밥, 슬픈 그 여물

  • 입력 2007.12.09 12:46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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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울 하늘에는 비 오다 말고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나는 변두리 객창에 앉아 이 글을 씁니다. 초저녁에는 오랜 가뭄 끝에 오는 비라 좋아했는데 나를 먹여 살리는 복숭아나무가 살고 있는 영천 땅도 아닌데 싶어 시큰둥해서 돌아보니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는 진눈깨비가 보였습니다.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비처럼 서울로 서울로 몰려오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쓸쓸했습니다.

아마도 늦은 저녁을 시켜 놓고 혼자 쭈굴치고 앉은 중늙은 사내의 몰골이 뒤적거리던 책갈피 속에서 가슴 짠한 시 한편을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작 며칠 만에 된장냄새가 그리워서 골목을 뒤지고 다니다가 결국 포기하고 수없이 버리고 지나쳤던 그 감자탕 집으로 들어와 조금씩 굵어지는 눈발을 곁눈질하며 밥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나 그 시를 읽었습니다.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따뜻한 밥이 되네//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시집이 한 권 팔리면/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박하다 싶다가도/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도 없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강화도 어느 바닷가에서 전업시인으로 살아간다는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 전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의 처지가 우리들 농사꾼과 어딘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비단 나만의 생각이라면, 그 죄는 순전히 진눈깨비 탓일 겁니다. 아니 타관 땅 늦은 저녁상 위의 초라한 밥 한 그릇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밥.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같이 먹성 좋은 농사꾼들에게야 밥이 하느님이지요. 그래서 ‘밥’하면 가슴 저 밑바닥에 서리서리 어려 있는 회한의 눈물이 떠오릅니다. 누천년 장구한 역사를 지켜온 농경사회의 유장한 물결 속에서 눈물로 지은 밥그릇이 무릇 그 얼마였을까요.

우리 어머니와 아내들은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여 놓고도 새참을 먹이고 점심 먹은 배가 꺼지지 않아도 중참을 챙겨 먹였습니다. 허기가 덤비기 전에 미리미리 먹어두고 참 억세게도 일을 했던 두레공동사회를 떠올려보십시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건 허기가 지는 것이라고 우리가 어디 길 떠날 때마다 어머니들은 얼마나 일러 주었던가요. 싸울 일이 있더라도 먼저 밥이나 먹고 나면 세상만사가 다 아름답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감옥에 갔던 전두환이도 비로소 경건하게 받들었을 한 그릇 ‘밥’입니다. 걸핏하면 ‘밥 먹고 합시다’라고 초를 쳐 국정을 농단했던 옛날(?) 국회의원들의 말씀은 또 얼마나 솔직한 표현이었습니까.

그런데 참 슬픈 일입니다. 경제가 엉망이라고 삼천리금수강산이 난리법석입니다. 돈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모두가 울상이지만 이 공장만큼 돈 안 되는 공장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농사꾼들은 다 그 공장 비정규직 ‘공장장’으로 취직해 있는데 부도율 세계 1위의 ‘쌀 공장’ 한번 제대로 살리겠다고 공약하는 대선 후보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농민들은 영원한 ‘밥’입니까.

내 생의 첫 슬픔이었던 밥 한 그릇. 슬픈 여물. 유서 깊은 가문. 나랏말씀이 다 거기에서 나왔지요. 천년을 개다리소반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밥 한 그릇을 경배합니다. ‘쌀’은 아니 ‘밥’은 역사적 사명을 다한 애물단지가 아니라 동방의 흰 수염입니다.

하찮은 제 벼슬 품계만 믿고 거들먹거리는 철들지 못한 장닭 무리들이 미꾸라지탕 먹고 용트림하며, 길을 두고 굳이 산으로 가려고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투쟁가를 부르던 그리운 절벽의 시절로 돌아가 슬픈 여물, 개다리소반에 낮게 정좌하고 전전긍긍하는 식은 밥 한 그릇 경배하라고 이르고 싶습니다만, 글쎄요…….그리하여 우리나라 밥 한 그릇 궁궁을을 해질 수 있다면 빈궁의 들판에게 밥 얻어먹는 이 중늙은이도 이제는 서정의 마을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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