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전사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14

  • 입력 2007.12.01 14:22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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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농민회가 시청에 나락을 적재하고 정문 앞에다 천막농성장을 꾸렸다. 나는 11월 한 달을 거의 대부분 영천을 떠나 있느라 농성장에서는 하룻밤도 지내지 못한 터라 모양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렀던 게 전부라 오늘은 부산 내려가는 길에 여유가 있어 시청으로 갔더니 본관 계단 중간에 나락 포대가 마치 옛날 전쟁 영화의 최후의 보루였던 방호벽처럼 든든하게 본관을 방어하고(?) 있었다.

나는 이파리를 다 빼앗기고 헐벗어 초라해진 등나무 아래에서 그만치나 볼품없는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연기를 꾸역꾸역 게워 올린다. 농민회 회원들이 천막농성장을 들락거리는 모습이 분주해 보인다. 나는 그들을 ‘초록전사’라고 부른다. 유정한 그 초록전사들의 어깨들이 더러는 당당하고 더러는 축 처져 쇠잔하여 조악해 보이기도 한다.

최후의 보루? 그렇다. 말이야 안성맞춤 격으로 딱 맞는 말이다. 저 나락이야말로 이 나라 국방의 최후 보루가 아니던가.

오늘날의 도시를 건설한 유목민의 후예인 농민들은 가을 추수도 채 마치기 전부터 ‘세계정부’와 맞장 뜨기 위해 대대적으로 격문을 돌렸지만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별로 주목해주지 않는다. ‘세계정부’의 신민들은 그들을 속 시끄러운 게릴라처럼 얕잡아 본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초록전사들인가. 장엄한 농업만년설 문장으로 이루어진,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드문 저 초록전사들의 전언을 세상은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남하하는 단풍의 물결이나, 한라에서 백두까지 북상하는 초록의 물결에는 관광버스를 타고 가서 춤추며 함께 할 줄 알아도 저 초록전사들의 노고에는 박수 한번 보내지 않는다. 갑자기 허무가 내 몸을 감싼다.

신자유주의의 맹신자들은 죽어도 읽어보지 못할 장엄한 문장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마지막 경전인 들녘은 머지않아 폐사지처럼 잡초에 뒤덮이고, 그 경전의 말씀을 가꿔 세상을 살리던 초록전사들은 마침내 울화가 쌓여 쓰러지리라고?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민중이라고 학교와 많은 책들은 내게 일러 주었지만, 역사발전의 주체는 늘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고 그들만이 발전에 대한 보상을 챙겨갈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역사발전에 백의종군 해온 농민들의 항변은 저렇게 야적되고 있건만.

새벽 두 시. 소쩍새가 운다. 나는 컴퓨터 자판기에서 손을 떼고 북으로 난 창문을 연다. 일제강점기의 시인 소월이 저 울음을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이라고 표현했던 이 나라 슬픔의 대명사 소쩍새가 우리 집 근처에서도 소쩍, 소쩍 울고 있다. 솥이 작다고, 솥이 작다고 자꾸 운다. 배가 고프다고, 피를 토하며 운다. 참 지독한 놈이다. 지칠 줄을 모른다. 저놈은 목구멍에 최첨단 발동기를 달아 놓은 것 같다. 누천년 대를 이어 피울음을 토하며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한다.

인간들은 들으라고 끊임없이 상소문을 쓰는 것 같다. 집요하다. 살 떨리게 무서운 놈이다. 쌀이 남아돌아 난린데도 남의 나라 쌀 팔아먹는 이 세상에서 밥솥이 작다고 철지난 풍자시를 쓰는 시인. 그런데 청와대 뒷산에도 저 시인 동족들이 살아서 이 새벽에 피 토하는 시를 읊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놈들도 사발통문을 돌릴 줄 아는지 모르겠다. 저놈들이 사발통문을 돌려 농민회가 전국대회 하듯이 청와대에서 ‘전국백만소쩍새대회’를 한번 열었으면 좋겠다. 집회금지니 원천봉쇄니 그런 걱정으로 울화통 터질 일은 없을 테니까 얼마나 좋겠는가.

그래서 〈농사〉 흉년이면 농민들 살림살이야 어렵겠지만, 〈농업〉이 무너지면 나라가 고생이라고 백만 소쩍새 피울음 상소라도 좀 써 주었으면 하고 헛 공상을 해본다. 청와대 그 폐허의 밤이 소쩍새 울음 간절하고 지극한 시간으로 경건해 졌으면 하고. 마침내 그 피울음이 죽비가 되어 누군가의 등짝을 아프게 후려쳤으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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