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아득바득 비상을 삼키겠다고 우기는데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13

  • 입력 2007.11.26 09:31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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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야 할 1930년대 자료 때문에 며칠째 서울에 머물고 있는데 생가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나는 그때 동대문운동장 부근에서 문학동네 술고래들과 회포를 풀고 있다가 천 리 남쪽 두메산골 내 생가 전화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재빨리 술집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아야 했다.

“니 어데고? 집이가?”

나는 움찔한다. 할마시의 전화 첫 마디는 십 년이 넘도록 변하지를 않는다. 이건 순전히 농민회 탓이다.

“니, 또 데모하로 갔나?”

또, 또…… 늘 이러신다. 이쯤에서 나는 중치가 콱 막힌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하고 있는 일을 말해봐야 할마시 귀에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 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나는 ‘문학’이라는 말로 할마시를 안심시킨다. 문학이라면 할마시도 웬만큼은 아신다. 둘째아들놈이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문학’이라는 웬 낮도깨비 같은 것에 홀려 곧잘 엉뚱한 짓거리를 하는 통에 산 넘고 물 건너가는 마음고생을 숱하게도 했는데 왜 모르시겠나.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할마시의 우환덩어리이다.

“저 늠의 손이 경찰서에 불려가더니 인자는 간다발이가 부어서 법원까지 들락거리는구나. 니놈이 죄는 참 마이 지은 모양이구나. 에, 빌어 처먹을 늠!”

고속도로를 틀어막은 죄로, 집회 주동자로 이리저리 불려 다닐 때마다 덩치가 제 애비보다 훨씬 커버린 손자 앞에서도 중늙은이 아들 이름을 알몸뚱이 날것 그대로 부르면서 욕도 걸판지게 퍼부어댔다. 그러면 나는 애들 앞에서 너무 하신다고 불만이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요번 공일날부터 마늘 심는다. 와가 좀 거들어라.”

그런데 나는 그만 할마시 염장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일요일은 데모하러 서울 가야 되는데요.”

“지랄한다. 아 지놈들이 아득바득 비상을 삼키겠다는데 니가 와 ‘벤또’ 싸들고 다니면서 말린다고 지랄이고, 지랄이!”

생가 할마시 호통에 나는 또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열두 살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다. 할마시 성격이 이렇게 괄괄해진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무조건 온너라. 안 오면 니깐 늠은 국물도 없다.”

할마시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내 귀에는 우레 소리만 가득하다. 한 해 양념거리 고추 마늘을 십 년 넘게 공으로 갖다먹는 판에 모양이 참 말이 아니게 되었다. 가뜩이나 품앗이 할 기력이 모자라 포항의 작은어머니며 손에 흙 한번 묻힌 적 없는 대구의 이종누님에 자형까지 불렀다는데 믿었던 일꾼 하나가 그 징그러운 데모하러 간다니까 단단히 부아가 치밀었을 것이었다. 할마시한테야 이미 낙인 찍혀 처내놓은 놈이니까 어떻게든 모면할 수야 있겠지만 동생이 문제였다. 칠팔월 그 염천에 복숭아 딸 때에는 사흘들이로 불러대면서 올해 마늘 심는 일에 빠진다면 그 후환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모종의 조처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모처로 전화를 건다. 해마다 5월이면 복숭아밭으로 적과를 하러오는 시내 아지매들의 얼굴이 하나씩 눈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시간을 보니 벌써 밤 열 시가 넘어서고 있다. 한참이나 신호가 울리고서야 자다 말고 깬 예순여섯 윤정자 씨는 내 귀에다 하품을 마구잡이로 쏟아 붓는다.

“이번 일요일에 놉 좀 하시더.”

“아이고, 안 된다. 그날은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 찬채가야 하는데…….”

“결혼식은 영감 보내고 부조는 벌어야 할꺼 아인기요.”

아지매는 갑자기 침묵에 빠져든다. 나는 입에 침이 마른다. “……할 수 없지 머. 아재가 오라카는데 우야노. 몇 사람이 필요한기요?”

“세 명!” 나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서울 길바닥에서 영천 아지매들 오야붕 윤정자 씨에게 꺽정이 책사 서림이처럼 헤헤거린다. 저 아지매들도 서울에 가는 것이나 진배가 없을 것이다. 정부가 아득바득 비상을 삼키겠다고 하는데 지금 말리지 않으면 그 죄를 어찌 다 감당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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