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시간에 밑줄 좌악 긋는다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12

  • 입력 2007.11.19 00:59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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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1일. 그리고 오후 3시. 그 날, 그 시간에 나는 분명 서울 어딘가에 가 있어야만했었다. 그런데 나는 영천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여 있었다.

나는, 아니 이 나라 모든 농민들은 연금 상태였다. 가관이었다. 공권력은 ‘서울공화국’의 안녕을 위한답시고 ‘아랫것들’의 공화국 입성을 원천봉쇄 해버린 것이었다. 소가 웃을 일이었다.

나는 영천사람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 땅의 영원한 소수민족일 수밖에 농민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가 유신정권이나 80년의 신군부 권력과 맞닥뜨려 한판 맞장을 뜨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가소로운 웃음을 실금실금 게워낼 뿐이었다.

“형님, 이래가야 우예 서울을 지킬 수 있겠는기요?”

식전 댓바람부터 한잔 걸친 ‘민주노총’이 느닷없이 염장을 지른다. 문득 며칠 전의 술자리가 떠올랐다. 그날도 우리는 백신애 전집 만드는 일로 만났다가 어김없이 술판을 차렸는데 불청객 몇몇이 끼어들었고 대화 내용은 시시껄렁했다.

파장 무렵에 누군가가 ‘민주노총’에게 이번 일요일 날 다른 약속이 있느냐고 물었고, 민주노총이 데모하러 서울에 간다고 하자, 누군가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느닷없이 왼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농사도 안 짓는 니가 서울은 와 가노?”

왼새끼를 꼬는 그의 말이 귓전에 다 닿기도 전에 내가 대답을 해버렸다.

“서울이 위험해서!”

“뭐라! 서어울…… 이 위험하다고?”

“야, 조옷나게 위험해요.”

“느긋들이 위험한 게 아이고?”

“광우병 공장 미국 소고기, 중금속 덩어리 중국 농산물에 서울 시민들이 무방비적으로 노출되어 있는데 우리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겠는기요?

나는 국경의 망루를 지키는 수자리처럼 이죽거린다.

“옛날에는 관제데모가 서울을 지키더니 요새는 좌파가 지키는구나.”

“예? ‘요새’는 청와대가 요새구마. 철옹성 아인기요.”

“……그래. 그 말이 딱 맞는 말이다…… 욕봐라. 몸이나 조심하고…….”

농민들이 길을 비키라고 무식한 공권력을 무식하게 밀어붙이지만 그러나 절벽이다. 지친 농민들이 엉덩이를 바닥에 철퍼덕 부려놓고 가쁜 숨을 고르는데 농민회 방송차에서 어느 지역 농민이 분신을 시도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아직도 국가권력의 죽임은 끝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2005년 11월15일의 여의도가 내 이마를 짚어준다.

그날, 나는 여의도에 있었다. 서울공화국이 막 어둠에 휩싸이던 그때, 여의도는 짐승의 시간이었다. 찢어지는 비명과 악다구니와 다급하게 치닫는 말발굽소리 같은 군화발소리에 파묻히던 도망자들의 발자국소리 속에서 칼끝처럼 튀어 오르던 비명, 비명들……그리고 신음소리들……절규……아비규환이었다.

농민들이 짓밟히는 곳은 처음으로 전국적인 농민봉기의 횃불을 올렸던 저 87년의 5.16광장, 그 자리였다. 그곳이 민중들의 울분을 토로하는 집회장소로 고정되자 공원으로 만들어버린 옛 5.16광장에서 군화발의 만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화려한 휴가’? 그날, 두 사람의 농민이 목숨을 잃었다.

무식한 놈이 소신까지 갖추면 미친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무식한데다 소신까지 떡하니 갖춰버렸다. 주체적 판단의 기능을 주인에게 맡겨버린 사냥개의 습성을 그대로 닮았다.

‘전혀 설득력이 없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어거지 집회’로 미리 예단해버리는 ‘윗것’의 시녀노릇에만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무식하고 충성에 대한 소신은 어마어마하다. 그 증거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고착이다. ……욕본다.

나는 오늘 칠성판 위로 눕고 있는 이 나라의 농업을 본다. 단 한자락 만장도 호곡도 없이 나라의 농업을 칠성판으로 떠메고 가려는 이 암장의 호상은 누구인가. 또 누구누구가 두건자리로 서 있으며 누가 유세차 축문을 지어 낭랑하게 읊조리고 있는가.

나는 짐승의 시간에다 밑줄을 좌악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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