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정미옥 <경남 고성군 마암면>

  • 입력 2007.11.19 00:57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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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동네안에 경찰들이 쫙 깔렸는데요. 어짜지요?”

▲ 정미옥 (전남 고성군 마암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일요일 새벽,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모를 서울 상경을 위해 이것 저것 챙겨놓느라 분주한 틈에 받은 현미의 전화였다.

“그렇나? 이것들이 동네에서부터 막겠다는 기가? 말 그대로 원천봉쇄네. 일단 아지매들하고 걸어서 동네밖으로 나온나. 차도 국도변에 주차하기로 돼 있으니까 빨리 갈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와 남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하우스에 가서 아직 잠에서 덜 깬 노오란 호박꽃에 수정액을 뿌리고 환기창을 열어두고 출발지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에 가지 못하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해마다 열리는 농민대회와 민중대회를 앞두고 의례 나오는 ‘불허방침’ ‘원천봉쇄’란 사자성어(?)에 우린 너무 익숙해 있었고 또 별 감동(?)을 받지 못해 우리식대로 ‘정면돌파’ 하리란 다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지금이 서슬퍼런 군사독재시절도 아닌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타당한 이유도 없이 막지는 않으리란 솜털같은 기대도 있긴 했다.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그 기대는 송두리째 무너지긴 했지만….

한사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그 낮은 목소리가 청와대 담벼락을 넘지 못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철문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아 백만 정도면 그 막힌 귓구멍을 뚫을 것 같아서 모이려고 하는데 그걸 왜 막는단 말인가?

마음을 단단히 하고 마을 어귀에 도착한 우리들은 경찰의 상경저지 방침이 만만치 않은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언론을 통해 집회를 막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버스 다섯 대였던 참가자 수가 줄고 줄어 결국 두 대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지역의 덤프연대와 전교조 조합원들이 함께 해서 만들어진 인원이었다.

수적인 열세였으나 그저 순순히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준비한 투쟁인데….

예년보다 일찍 잡힌 투쟁날짜도 부담이었고 늦게 끝난 가을걷이도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장애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장님과 부녀회장님께 편지 쓰고 몇 번씩 전화해서 찾아가고 못 가신다면 투쟁기금으로 나락을 주시는 분들의 정성을 대신 받으며 만들어온 오늘이다.

하얀 경찰차가 버스를 막아서 있고 지역경찰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모습은 분명 시대를 거스르는 반역사적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여농 회장님의 용감한 투쟁정신을 닮은 고성의 여성농민들은 온몸으로 경찰과 맞섰다. 고성군 여농회장님이 차를 도로안에 정차하고 나머지 농민들이 도로를 점거하며 힘찬 투쟁을 전개하였다.

2시간 가량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 결국 밀려나오긴 했지만 치미는 분노에 이어 왠지 담담해지며 주먹에 힘이 불끈 쥐어졌다.

“노무현 정권이 민심 앞에 떨고 있구나.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우리들의 입을 막으려고 하지 않을테니까” 우리가 이번 싸움에서는 이길 수 있음이 분명해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FTA반대, 쌀값보장, 비정규직철폐, 민중생존권보장’을 위한 우리들의 주장이 너무 정당한 것임이 더욱 확실해진 이상 이번 대회 때보다도 더 많은 농민과 노동자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를 만들어야겠다. 비록 서울에서의 투쟁엔 결합하지 못했지만 전국 방방곡곡을 뒤흔들어놓은 11월11일, 민중들의 항거는 세상을 바꾸는 디딤돌이 되기에 충분했기에 우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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