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물 지는 날

  • 입력 2011.08.01 11:32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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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웬일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자고 이토록 비를 퍼붓는지 하늘이 야속하기만 하다. 작년에는 장마철 지나 팔월 한 달 내내 비가 오더니 올해는 아예 작심한 듯 유월부터 내리 물폭탄이다. 밤낮으로 강에다 삽질을 해대는 자들을 심판하려는 모양인데, 그 와중에 죽어나는 건 농사 망치는 농민이다가 기어이 이번에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백성들이 무슨 죄인지, 하늘은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더니 과연 그런가보다.

한 달 내내 물속에 들어앉아 있다시피 한 과수원도 그예 시난고난 시들어간다. 복숭아는 크지도 못한 채 떨어져버리고 사과나무는 뿌리가 활동을 못해 낙엽이 지듯 잎을 떨군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숱한 판에 엄살 부리는 격이지만 불길한 징조가 자꾸 느껴진다. 예전에도 여름이면 폭우가 내리곤 했지만 이런 재앙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남한강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해마다 강물의 범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범람은 지금 내게 어떤 신비함으로 남아있다. 

나는 기억한다.

아홉 살의 여름, 강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큰 비가 내려 강으로 흘러들던 물이 미쳐 강으로 합류하지 못하고 역류하는 것을 어른들은 ‘뱃물이 들어온다’고 했다. 앞산에 올라가 본 광경은 너무나 놀라웠다. 이미 강은 흔적도 없고 황토물이 바다를 이루어 올라오고 있었다. 드넓던 큰들 논배미가, 골짜기의 마을들이 모두 잠겼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누구누구네 집이 폭삭 넘어졌고 그날 우리 집 외양간 한 귀퉁이도 무너졌다.

그렇게 저녁나절이나 되었을까, 어느 노인이 ‘이제 나가신다’고 했다. 한 뼘이 밀려왔다가 두 뼘이 나간다고도 했다. 과연 다음날 아침에는 황토물이 멀찍이 물러났고 나는 삽을 들고 논배미로 향하는 어른들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았다.

아직 물이 차서 겨우 논둑만 드러난 논 가운데에 어린애만한 잉어들이 뛰고 있었다. 새풀내를 맡은 잉어들이 물을 따라 올라온 것인데 나는 지느러미를 드러내고 노니는 잉어와 그들을 좇으며 삽자루를 내려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환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실제로 등이며 머리에 삽날을 받은 잉어들을 들쳐 멘 어른들의 등에 흐르던 피와 왠지 나를 쳐다보는 것 같던 잉어의 붉은 눈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잉어들이 온 곳은 남한강이 아니었다. 강에는 그렇게 큰 잉어들이 살지 않았다.

남한강의 물살이 세차게 흐르다 제 힘을 못 이겨 한 자락 물길이 빠져나와 돌아가면서 마을 아래쪽에 소(沼)를 이룬 곳이 있었다. 어떻게 강가에 그런 소가 만들어졌는지 내 앎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어른들 말로는 실 한 꾸리가 풀린다는 깊고 깊은 소였다.

그곳을 용소라고 불렀는데 물이 계속 돌고 있어서 아무리 수영을 잘 하더라도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전설에 따르면, 병자호란을 당한 한 장수가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이 소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가 타던 애마가 사흘 밤낮을 울며 소를 돌다가 주인을 따라 죽었다고 했다. 그 후로 말이 돌던 방향으로 물이 돈다고 했다.

소의 가장자리에는 버드나무가 자라나 가늘고 긴 가지를 물속에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는 용소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 옆에 미루나무 숲과 꽤 널찍한 모래밭이 있어서 놀이터로 삼곤 했다. 뱃물이 들어올 때 올라왔던 잉어가 사는 곳이 바로 그 소였다.

나는 어느 어스름 녘에 버드나무에 올라와 앉아 있던 시커먼 가물치를 본 적이 있다. 먼 옛날의 전설과 들어갈 수 없는 금기의 물, 가물치가 나무에 앉아있던 그 깊은 소, 그 무렵 세상을 뜬 누이의 기억과 더불어 용소는 내 안에 인간이 건널 수 없는 어떤 심연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창밖에는 폭우가 몰아친다. 아무래도 우리가 깊은 심연을 건너는 중인 것만 같다. 언제나 환한 하늘이 다시 열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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