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두 그루

  • 입력 2011.07.11 11:55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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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 귀퉁이에 그루터기가 생겼다. 한 동안 마음이 아파 잘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요즘은 자주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던 은행나무가 베어지고 남은 그루터기다. 나이테를 세어보니 서른 살도 넘은 나무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두 팔로 감싸도 여러 뼘이 남던 아주 굵은 은행나무였다.

지난겨울, 두 달간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우람했던 은행나무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무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텅 빈 공간이 서럽도록 낯설었다. 여름이면 그늘을 지어주고 가을이면 은행잎을 융단처럼 깔아주던 나무였다. 짐작은 하면서도 아버지에게 따지듯 물었더니, 목공예를 하는 사람이 베어갔단다. 하지만 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마당에 있는 나무를 베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자꾸만 무성해지는 은행나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디서 비롯된 믿음인지 모르겠지만, 집 앞을 큰 나무가 가리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거였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언젠가부터 은행나무를 베어야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딱히 잘 되는 일도 없지만 특별히 나쁜 일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그 큰 나무를 벨 수는 없다는 게 나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사소한 일만 생겨도 애꿎은 은행나무 탓이었다. 그렇게 부자지간의 긴장 속에서 연명하던 은행나무가 기어이 변을 당한 것이었다.

십육 년 전에 처음 귀농을 했을 때, 논과 밭이었던 땅에 눈에 띄는 나무 네 그루가 있었다. 크고 잘 생긴 은행나무와 잣나무 두 그루씩이었다. 은행나무는 전봇대 하나 정도 거리를 둔 채 마주보고 있었는데 첫 눈에 보기에도 암수 한 쌍이었다. 수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치고 암나무는 옆으로 벌리기 때문에 단박에 알 수 있는 게 은행나무다.

암나무에는 어찌나 많이 은행이 열리는지 가을에 따서 거둔 것을 이듬 해 가을까지 두고 먹을 정도였다. 나무 주변에 넓게 비닐 멍석을 깔고 올라가서 가지를 흔들면 우박처럼 쏟아진 은행이 수북하게 쌓이곤 했다.아이들까지 동원되어 은행을 줍는 일은 해마다 벌어지는 즐거운 행사였다. 그런데 이번에 베어진 나무보다 암나무는 삼 년이나 먼저 잘리고 말았다.

밭을 과수원으로 만들면서 은행나무가 과수원 가운데를 차지하게 된 탓이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복숭아나무가 크면서 은행나무 주위에 있는 나무들에 달린 복숭아는 잘 크지도 않고 쉽게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은행나무가 점점 크면서 그늘에 가려 햇빛을 보지 못해서였다. 몇 해를 지켜보다가 결국 은행나무를 베기로 했다. 복숭아나무를 자를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다른 쪽 밭머리에 있던 잣나무 한 그루도 똑같은 운명을 맞았다. 새들이 둥지를 틀고 다람쥐들이 연해 오르내리던 잣나무를 베면서 나는 자꾸만 손이 떨렸다. 그렇게 해서 두 쌍의 나무는 각기 짝을 잃었다. 잣나무야 짝이 없어도 해마다 잣이 달리지만 은행나무는 그렇지 않다.

나는 암나무를 한 그루 사다가 맞은 편 산비탈에 심어주었다. 어서 자라 은행이 달리길 바라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고 그저 혼자된 수나무가 안타까워서였다. 물론 그거야 혼자 찧고 까부는 사람의 마음일 뿐이고 그 후에도 수나무는 열심히 가지를 뻗고 잎을 키워 풍성한 그늘을 드리웠다. 그 아래 평상을 놓아 땀을 식히고 찾아온 벗들과 막걸리를 나누기 얼마였던가.

나무 테를 드러낸 그루터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뽀얗고, 앉으면 편하다. 해질녘이면 한참을 앉아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마지막에 주는 게 그루터기였던가. 귀농이랍시고 와서는 먼저 자리 잡았던 애꿎은 나무를 세 그루나 열반에 들게 했으니 이 죄업을 어찌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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