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캐는 날

  • 입력 2011.07.04 10:27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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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캐는 날(51)

장마가 잠시 그친 틈을 타 감자를 캐기로 한다. 이미 하지가 지나 잎과 줄기가 말라버렸는데도 차일피일 미룬 것은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명색이 농군의 자식들인데 시내로 나가 학교에 다니느라 호미 한 번 쥐어볼 새가 없는 것이다. 하여 주말로 날을 잡아 감자라도 캐게 할 요량이었는데 자꾸 비가 오락가락하여 더 미룰 수가 없었다.

텃밭에 고작 서너 이랑 일구어 심은 감자라 별 품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구색은 맞춘다고 자주감자도 조금 심었더랬다. 먼저 마른 줄기를 뽑기 시작했다. 줄기에 딸려 올라오는 조그만 감자알들을 떼어 밭가에 던져두고 비닐을 걷는다. 요즘은 무얼 해도 다 검은 비닐을 씌운다. 고추나 깨, 고구마도 마찬가지다. 풀이 나지 않고 습기를 잘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비닐은 잘 벗겨지지 않고 자꾸만 찢어진다. 용케도 비닐 틈을 뚫고 난 바랭이며 쇠비름 따위 풀들이 엉겨 붙은 탓이다.

부모님들과 본격적으로 한 골씩을 잡아 감자를 캐기 시작한다. 무릎이 아픈 부모님이야 오래 전부터 엉덩이에 깔개를 붙이지 않으면 앉은 일을 못하지만 올해는 나도 결국 깔개를 차야 했다. 줄을 허벅지에 매어 일어서도 엉덩이에서 떨어지지 않게 만든 간이 의자인데 영 폼은 나지 않는다.

장마 탓에 땅이 물러 호미대기는 수월했지만 감자에 흙이 많이 붙어 털어내는 수고는 더한다. 씨알은 시장에서 파는 것처럼 굵진 않아도 보통 계란만은 하다. 요즘에는 감자나 고구마 같은 구근류에도 성장을 촉진하는 영양제를 뿌린다. 나야 집에서 먹을 요량으로 조금씩 하니까 씨만 심어놓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도 감자는 꽤 볼만한 꽃을 피우는 족속이라 꽃 필 무렵이면 자주 눈길을 주는 편이었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 한 자락도 깔려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권태응이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그의 대표작인 감자꽃은 꽤 유명한 시다. 마침 그가 내가 사는 충주 출신이라 탄금대 공원에 시비를 세워놓고 해마다 그를 기리는 문학행사도 펼쳐진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수십 년 전부터 하는 행사인데 나는 그 때마다 버스로 한 시간이나 달려가 백일장에 참가하곤 했다. 수업을 빼먹는 재미는 쏠쏠했지만 차멀미가 심했던 내게 비포장길을 오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리고 입선을 놓칠 때면 비석에 쓰인 시를 보며 도대체 시 같지도 않은 시를 뭐라고 이 난리냐고 속으로 툴툴거리곤 했다.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마나 자주감자

이 단순하고 짧은 시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낀 것은 그로부터 십 수 년의 세월이 더 흘러서였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캔 감자는 사십 킬로 정도였다. 햇빛 보지 않게 잘 간수하고 먹으면 몇 달은 갈 반찬거리다. 옛날에 살던 고향 마을에서는 하지가 지나야 모내기를 하였다. 논에서 마늘을 캐내고 심기 때문에 그리 늦는 것인데 해마다 남한강 물이 범람하여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 가능한 일이었다.

모내기를 하는 날이면 보통 오후 참으로 찐 감자와 국수를 냈다. 푸지게 찐 통감자를 들기름 두른 가마솥에 소금 간해서 노릇하게 볶아내면 논물에 불은 손으로 다들 잘도 먹었다. 솥바닥에 눌러 붙은 감자누룽지는 얼마나 맛났던가.

옛 생각에 젖어 씨알 굵은 놈으로 자루를 채워 시내로 나갔다. 아내와 앉아 껍질을 벗기고 아이들 올 시간에 맞춰 감자를 찌고 프라이팬에 달달 볶았다. 애들 입맛에 맞게 설탕도 치고 일부러 누룽지를 만들어 따로 긁어도 놓았다.

성대한 만찬이라도 준비한 듯 의기양양했는데, 맛을 본 아이들 기색은 영 마뜩찮아 보인다. 맛있다를 연발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모양이었다. 결국 나 혼자 밥 대신 감자 열댓 개를 소주 두 병과 더불어 배 두드리며 먹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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