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 입력 2011.06.07 10:09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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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소도시에서는 닷새마다 장이 열린다. 대형 마트가 두 개나 있는데도 장날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요즘은 재래시장을 살린다고 아크릴로 천정까지 만들어 놓아 비가  와도 걱정이 없다. 나 역시 장날이면 대개 한 두 시간쯤 장을 보거나 일 없이도 장터를 어슬렁거리곤 하는데 오일장에는 마트에서 살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민물고기며 다슬기, 산나물 등속이 풍성하고 직접 농사지은 서속, 기장, 율무, 수수 따위는 물론이고 제철에 나는 과일이나 채소의 값도 눅다. 물론 요즘은 채소 값이 너무 싸서 눈을 의심할 지경이긴 하다. 실한 배추 세 포기가 든 망 하나에 고작 삼천 원이란다. 생산비와 상하차비, 운임 등을 뻔히 아는데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값이었다.

장사하는 사람 말로는 공짜로 밭에서 가져오기 때문에 그 가격에 판다고 한다. 트랙터로 갈아엎는 수고라도 덜고자 장사꾼에게 그냥 가져가라고 했을 어느 농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가슴속에는 피눈물이 흘렀으리라. 파와 양파도 대 파동이 일어난 듯 도무지 값이 아니다.

내가 사는 곳에도 언뜻 지나다니며 보아도 작년보다 파를 심은 면적이 눈에 띄게 늘었다. 작년에 일어났던 배추, 파 등의 폭등에 놀란 정부가 파종을 독려하고 마땅히 심을 작물이 없는 농민들이 행여나 하는 기대로 다투어 심은 까닭이다. 그 결과가 가격 폭락으로 이어질 것은 불 보 듯 뻔하다. 정부 말은 언제나 거꾸로 들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저리 몰릴 수밖에 없는 게 농민들이다.

장을 둘러보는 내내 속이 상해 기어이 낮부터 술 한 병을 비우고 말았다. 잠시 시름을 잊고 사람들과 장꾼들 속을 하릴없이 걸어 다닌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늘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게 일이라면 일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여하 간에 당대 사람들이 쓰는 입말을 잘 살려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동부지짐이를 부치는 할머니 곁에서 막걸리 한 잔을 놓고 귀를 기울이거나 원예조합 주차장에 차일을 친 국밥집에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곤 한다.

가끔은 슬쩍슬쩍 메모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싶으면 몰래 녹음기를 켜놓고 본격적인 도청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람들 이야기 듣는 재미로 장에 나다니기를 십오 년째이면서도 이야기를 듣거나 말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 장터를 걷다 보면 꼭 한 번은 구성진 트로트 가락이 들려온다. 사람이 부르는 것은 아니고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다.

그리고 노래와 함께 조그만 수레 하나가 혼자 굴러온다. 이쑤시개나 손톱깎이, 목욕타월, 싸구려 양말 등속을 빼곡하게 실은 수레 뒤에는 한 남자가 온몸을 땅에 붙이고 힘겹게 배밀이를 하고 있다.

남자의 하반신은 검은 고무로 싸여있고 얼굴은 사람들의 발길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뒤집어써 언제나 지저분해 보인다. 나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되도록 그에게서 사는 편인데 대개 천원을 넘지 않는 싸구려들이라 생계를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일곤 한다.

그리고 그가 가진 불행의 무게가 하도 커 보여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염도 내지 못하였다. 농사를 짓는 애환 따위는 그 앞에서 감히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그 역시 물건을 사고 팔 때라도 웃음을 짓는 일 없이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구성진 노래 테이프만 장이 이울도록 틀어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노래가 밝은, 그러니까 관광버스 스타일로 변했다. 변한 건 그 뿐이 아니었다. 그의 수레 뒤에 조그만 수레 하나가 더 따라 다녔다. 역시 하반신을 고무로 싼 젊은 여자였다. 박꽃처럼 환한 얼굴에 화장까지 예쁘게 한 그 여자는 갓 결혼한 남자의 아내였다. 십오 년 만에 본 그의 웃음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 언젠가 파장 무렵에 그와 막걸리 한 잔 나눌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암울한 날들이다. 과수원을 하는 사람들도 전국에서 난리다. 나무가 말라죽고 제대로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고들 한다. 나 역시 최악의 작황이던 작년보다도 상태가 나쁘다. 파장을 앞둔 장터처럼 어두운 징조가 농민들에게 드리우고 있다. 아무래도 희망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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