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게 가도 좋은 시절 안 오겠나”
전농 부산경남연맹 조병옥 지역농업위원장

정직한 꿀농사, 유기농 매실 13년차
농민과 소비자들의 연대 맡아야 할 지역농업위원장 책임감 느껴

  • 입력 2011.05.30 13:28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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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 산인면 입곡리, 시간도 더디게 흐를 것 같은 조용한 마을 어귀에 조병옥 전농 부경연맹 지역농업위원장이 손을 흔든다. 마을을 찾으려고 전화를 몇 번 걸었던 탓에 마중을 나왔던 것이다.

조 위원장의 집은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 집과 좌우로 이웃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이끄는 초록마당의 징검돌을 따라 들어가 보니 왼편에는 벌통이 여럿 보였다. “잘~ 살려고 농촌에 들어왔다”는 그는 ‘잘 산다’와 ‘잘~ 산다’의 차이를 아느냐고 되물었다.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므로 그는 곧 “채우려 하지 않고, 버리는 것이 잘~ 사는 일이다. 이웃사랑, 학문, 열정 등은 채울 것들이고 돈, 명예, 욕심 등은 버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생각이 없으면 촌에 살기 어렵다고 덧붙이는 그는 13년 전에 도시의 삶을 접고 고향에 왔다.

나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직장을 다니며 분재원에서 심고 가꾸는 것을 배웠다. 그는 고향에 내려와 3년 동안 키운 나무 3만주를, ‘파는 재주’를 배우지 못해 몽땅 베어버린 실패담을 들려줬다. 첫 번째 농사인 나무 농사를 실패한 이후 지금까지 그의 주된 농사는 양봉이다.

“고향에 내려왔지만, 농사를 짓고 사는 일은 먹고 사는 문제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아내와  울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초반에는 농민회도 전혀 활동할 생각이 없었다.

“농민운동은 하기 싫었다”는 그는 그러나 함안군농민회와는 ‘웃기는 우연’이 있다고 말했다. 웃기는 인연인즉슨, 고등학생 때인 ’88년에 함안에 농민회가 창립됐고 이를 알리는 포스터를 ‘조병옥 고등학생’이 붙이고 다녔다.

▲ “희생만 강요하기에 농민운동가들이 너무 나이들었다”고 말하는 조병옥 위원장

 

그런데 포스터에 소뿔이 있다는 이유로 경찰들은 농민을 선동한다며 떼라고들 했고, 어린나이였지만 어처구니없었다. 그해 겨울 창립행사를 하는데 농민보다 많은 공무원, 농협 직원, 경찰들이 감시 아닌 감시를 했고, 창립행사 중 “자, 모입시다” 구호 한마디에 주최측 농민들을 잡아갔다.

농민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잡아가고, 친정부 단체에서 악대를 울리며 집회를 하는 것은 통용되는 세상, 이래선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굳어졌다. 결국 사회문제를 어렴풋 아는 고등학생은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으로, 직장시절에는 노동운동으로, 농민이 돼서는 농민운동으로 ‘잘~ 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다.

함안군농민회는 2001년 재창립했다. 농민운동은 하기 싫었다던 조 위원장과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이 추진했고, 이후 사무국장을 6년 했다.

“농사는 농사대로 하면서 농민운동을 하기란 너무 고된 일”이라는 그는 다들 빚을 내서 생활에 허덕이고 있는데 희생만을 강요하기에 농민 운동가들이 너무 나이가 들었노라고 되뇌었다.

예년 같았으면 만개한 꽃을 따라 벌을 치러 보름간 타지를 다녔을 그는 100군(통)의 벌이  현재는 20군만 남아있는 상태다. 인근의 발파공사로 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보통 네 번 꿀을 내는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올해는 ‘절단’이 났다.  인터넷을 통해 유사한 사례를 찾은 그는 현재 피해보상을 요청한 상태다.

‘숲안농원 양봉원’ 그의 명함 한 면에는 꿀, 로얄제리 등의 봉산물과 유기농인증 매실, 토종육쪽마늘 등의 농산물이 적혀있고, 또 다른 면에는 전농 부경연맹 직함이 적혀있다. 누군가는 그를 ‘복합영농인’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농민운동을 한다는 게 한편으론 신기하다”고 감탄사를 냈다.

 작년부터 전농 부경연맹 지역농업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역농업위원장에 대해 그는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거리를 좁히는 로컬푸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며 “농민들 생활을 챙기는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사회분위기에서 농민들도 관행 농법을 탈피해 안전한 먹을거리의 생산의 주역이 된다면 ‘상생’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무거운 책임감 속에서도 반드시 성공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또 “농민들이 보다 농민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도 중요하다”는 그는 어렵지만 차츰 변화가 느껴진다면서 희망을 주억거렸다.

“더디게 가도 좋은 시절 안 오겠나.” 그래야만 그의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꿈인 ‘농사’ 짓는 일이 지금보다는 수월해 질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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