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에서

  • 입력 2011.05.23 08:42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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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푸성귀를 주로 심어서 먹는다. 마늘이나 고추 같은 양념이며 오이, 호박, 열무, 상추, 배추 따위를 심어 여름철이면 찬거리 걱정을 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다. 봄이면 들과 산에서 나는 쑥이며 미나리, 각종 나물이 있어 그런대로 밥상이 싱그럽다.

아이들은 거의 입에도 대지 않지만 나는 산나물을 몹시 즐기는 터라 제 철에 먹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묵나물을 만들었다가 겨우내 야금야금 반찬 겸 안주로 삼는다. 하여 아무리 바빠도 짬을 내어 산나물을 뜯으러 간다. 주로 다래 순과 고사리, 취나물 등을 묵나물로 만드는데, 고사리는 자칫 때를 놓치면 잎이 피고 말아 몇 해 전에 뿌리를 캐어다가 열 평 남짓 고사리 밭을 만들었다.

작년부터 고사리가 올라와 제사상에 올리고도 드물지 않게 밥상에서 만나게 된다. 올해는 두어 주일 전에 다래 순을 한 자루 따다가 이미 삶아 말렸고 오늘은 취를 뜯기로 했다. 바쁜 철이긴 해도 한 나절쯤 겨울 반찬을 위한 짬은 내어야 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우선 가랑잎이 푹신한 참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 한 대를 끄는데, 연초록 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싱그럽기 그지없다. 과수원을 하는 사람은 산의 참나무를 보며 나무의 상태를 짐작한다. 나뭇잎 색이 참나무보다 진하면 거름이 센 것이고 옅으면 거름기가 부족한 것이다.

참나무 잎이 점점 진해지는 것에 맞추어 과수의 잎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으로 본다. 옛말에 흉년이 드는 해에는 도토리가 많이 열린다고도 하거니와 양식거리 없는 백성들에게 도토리라도 내어주려는 갸륵한 나무가 참나무다.

본격적으로 취를 찾아 산을 오르는데 이게 웬일인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많은 취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먼저 자란 놈은 두어 뼘이나 되게 키를 세웠고 아직 연한 잎을 내미는 것들도 점점이 널려 있었다. 수십 포기가 무더기 진 곳도 드물지 않아 취나물 밭을 만난 것만 같았다. 겨우 한 시간 쯤 지나자 메고 온 망태기가 가득 차 더 담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연 기쁨에 넘쳐 집으로 달려 가 아예 마대자루를 챙겼다.

산비탈에서 연신 미끄러지고 찔레 덤불에 긁히면서도 나는 무슨 노다지라도 만난 양 취를 뜯는데 정신이 팔렸다. 허긴 돈으로 쳐도 기십만 원은 넘을 터였다. 어디서 그런 사나운 욕심이 생겨났을까. 송화 가루와 땀으로 끈적이며 온 산의 취를 몽땅 뜯으려는 기세로 나는 산을 헤매 다녔다. 가끔 누군가가 뜯은 자국이 보이기도 했다. 이상한 욕심에 들린 나는, 대체 남의 뒷산까지 와서 취를 뜯어간 사람이 누구냐고 혼자 핏대를 올리기도 했다.

전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취가 올라온 것은 봄에 비가 자주 온 까닭이었다. 올봄처럼 많은 비가 온 적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도 없었다. 음력 사월이면, 계곡에 사는 가재가 사월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절규할 만큼 비가 오지 않는 달인데 올해는 참으로 비가 자주, 많이 왔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취가 올라온 거였다.

그렇거나 말거나 마대를 눌러가며 취를 뜯다가 어느 순간 가랑잎에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작년 가을에 떨어진 밤송이가 아직도 가시를 세우고 있는 자리였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아픔과 함께 식은땀이 쭉 흘렀다. 밤송이는 떼어냈지만 여러 개의 가시가 박힌 게 틀림없었다.

아픔을 참느라 담배 한 대를 피우는데 문득,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보다 두 배도 더 취를 뜯었으면서도 왜 이토록 악착스러운가 말이다. 보다 못한 산의 정령이 그만 좀 하라고 밤송이로 응징을 한 것만 같았다.

가만히 보니 누군가가 뜯은 자국도 사람이 아닌 고라니나 토끼가 입댄 흔적이었다.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횡재라도 만난 듯 욕심을 부린 마대자루가, 꼭 나물의 무게만은 아니게 한없이 무거웠다. 김수영 시의 한 구절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정말 얼마큼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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