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씨

  • 입력 2011.05.11 10:38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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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라는 흔한 질문은 얼핏 답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또 생물학적으로 당연히 알이 먼저다. 알은 모든 조류를 포괄하고 닭은 조류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알을 계란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오랜 진화를 통해 계란은 조금씩 다른 형태의 병아리로 부화하고 종내는 닭이라 이름붙이기 어려운 어떤 조류가 나올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

그 질문을 꽃과 씨에 적용하면 어떨까? 알과 비슷한 것은 아무래도 꽃보다는 씨이므로 씨가 먼저일 것 같다. 씨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니까, 답은 자명한 듯하다. 하지만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반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복숭아꽃이 지고 사과꽃도 분분이 꽃잎을 날린다. 꽃받침 아래에는 이미 수정이 된 열매가 도톰하게 부풀었다. 과수원을 하다보면 가끔 신기한 나무의 생리를 보게 된다. 꽃이 지는 요즘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영 지지 않는 꽃이 더러 있는 것이다.

때로는 한 달 이상, 두 달 가까이 굳건하게 꽃잎을 펼치고 있는 놈도 있다. 처음에 나는 식물학적으로 중요한 돌연변이라도 발견한 줄 알았다. 지금도 그 원인을 정확히 설명하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짐작은 하고 있다.

꽃망울이 터질 무렵이면 아침저녁으로 과수원을 꼼꼼히 살피게 된다. 성명미상의 어떤 벌레들은 몽우리를 갉아먹는 못된 습성을 지니고 있고, 꽃이 피는 모양으로 나무의 상태나 시비 여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꽃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다.

복숭아나 살구, 벚꽃 같은 것들은 꽃모양은 달라도 같은 종류들이다. 씨가 하나밖에 없는 핵과류인데, 꽃술을 보면 재미있다. 꽃잎 가운데 솟아있는 꽃술은 보통 열 개에서 이십여 개 정도이다.

그 중 가운데에 다른 것들과 다른 하나의 꽃술이 내밀고 있다. 색이 밝고 끝에는 점액질로 보이는 묽은 액이 반짝인다. 바로 그 꽃술이 꽃가루를 받아 씨를 만드는 구실을 한다. 점액질은 바람에 날려 오거나 벌과 나비가 묻혀오는 꽃가루를 받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꽃가루를 받아 수정이 되면 곧 분비를 멈추고 끝이 검게 변한다. 그 순간부터 그 꽃술 밑에서 씨앗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중요한 꽃술은 아주 힘이 세서 과일이 다 익어 사람이 먹을 때까지 흔적이 남아 있는데, 복숭아나 살구의 맨 밑에 약간 뾰족한 형태의 검은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나머지 다른 꽃술이 하는 역할은 향기를 내뿜어 중매쟁이 벌을 유혹하는 것으로 짐작할 뿐, 아직 모르겠다.

사과 배처럼 여러 개의 씨앗이 있는 과일은 조금 다르다. 꽃술 중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꽃술이 꽃가루를 받는다. 그 흔적도 역시 과일의 아래쪽 움푹 들어간 곳에 여러 개의 털 모양으로 남는다.

꽃잎은 어떤 역할을 할까. 순전히 내 짐작이지만, 바람에 날아오는 꽃가루를 잡아주는 게 꽃잎이 하는 일인 듯하다. 꽃가루가 고개를 내민 꽃술을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품을 벌리는 것은 상당히 과학적인 행위다. 작은 날것들이 바람을 피해 꽃술에 앉도록 보호하는 일도 꽃잎이 맡은 임무다. 그래서 수정이 되고나면 이내 고단한 어깨를 빼어 바람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것이리라.

도시에서도 흔히 보게 되는 진달래나 철쭉 같은 꽃들도 핵과류 꽃과 같은 꽃술을 가지고 있다. 꽃이 지고 나서 자세히 보면 긴 꽃술 하나가 남아 있고 그 아래 씨앗이 맺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무지 지지 않는 강철 꽃들은 불행히도 수정이 되지 않은 꽃이다. 수정이 되지 않아도 대개 지고 마는데, 몇몇 꽃들은, 씨도 남기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며 버티고 또 버틴다. 이미 꽃가루도 벌도 오지 않는 과수원에서 기나긴 기다림을 견딘다. 무서운 꽃이다.  아무래도 씨보다 꽃이 먼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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