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와 개밖에 모르던 그가 길바닥으로 나선 이유

김포 무쏘목장 윤장희 씨

  • 입력 2011.05.11 10:29
  • 기자명 김황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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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짜고 젖소를 돌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낙농인들은 직업 특성 때문인지 대체로 우직한 성품이다. 젖소 곁을 하루도 떠날 수 없는 처지 때문일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며 한 눈을 파는 일도 별로 없다.

그 중에서도 김포시 대곶면 송마2리에서 무쏘목장을 운영하는 윤장희(42) 씨는 특히 그랬다. 어려서부터 농장을 하는 것이 꿈이었던 윤 씨는 고등학교 축산과를 졸업하자마자 낙농을 시작했다. 89년, 90년에 목장하던 누나에게 숫송아지를 사서 처음 홀스타인을 비육한 것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 낙농을 이어왔다.

“처음에는 아버지 목장 한켠에 얹혀서 길렀다. 한마리 팔아 두 마리, 두 마리 팔아 네 마리로 소를 불렸다. 일을 하다보니 용접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동네 형님께 철공일을 배웠다”는 윤 씨. 그렇게 해서 빚을 내지 않고 차근차근 늘려 지금에 이르렀다. ‘사회성이 없어서’라는 윤 씨는 지금까지 행정에 드나드는 일도 꺼려 정부자금은 후계자자금밖에 받은 것이 없다.

▲ 윤장희 씨

 

“구제역에 걸리기 직전에 모아놓은 1억원으로 집을 살까, 트랙터를 살까 하다가 트랙터를 샀다. 그런데 소가 한 마리도 없어서…(웃음)”

그는 낙농을 시작하면서부터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 “‘윤장희, 무쏘목장이 만든 소다’ 하는 소를 만드는게 내 꿈이었다. 품평회에 나가는 것도 수상이 목적이 아니다. 많은 소가 아니라, 혈통있고 수준 있는 소를 기르고 싶었다”는 윤 씨. 그래서 품평회를 열심히 나갔지만 수상경력은 별로 없다. ‘무쏘목장’의 순수 혈통이 아니면 아무리 좋아도 절대로 내보내지 않았기 때문.

윤 씨는 젖소 뿐만이 아니라 혈통 좋은 사냥개와 진돗개도 7~8마리씩 키우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미생활이라고 한다. “거의 팔지는 않고, 달라는 사람 있으면 주고…”

아내와 우등생인 초등학생 자녀가 둘씩 있지만 그의 일과는 목장을 돌보고 개들과 산에 올라가는 것이 전부였다. 담배도 안하고, 술은 맥주와 와인만 한다는 윤 씨는 말 그대로 “소와 개만 알던 사람.” 그런 그를 사회로 나오게 한 것은 구제역과 정부였다.

윤 씨는 지난 11월 시작된 지독한 구제역으로 81마리의 젖소를 전부 축사 곁에 묻었다. 1마리만 걸렸지만 당시에는 전두수를 묻어야 했다. 이 일로 윤 씨는 전국 구제역 피해 낙농가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의 사무차장을 맡아 낯설고 물설은 여의도 거리 복판에서 32일간 노숙 농성을 했다.

품평회를 많이 다니다 보니 얼굴이 알려져 사무차장 자리를 맡게 됐지만 정치도 모르고 집회도 몰랐다. 그저 형님들이 시키는 일만 했던 윤 씨지만 정부에 대한 반감은 깊어졌다. 윤 씨는 “정부도 낙농에 대한 (살처분)보상 기준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정부는 출범할 때 부터도 농업 정책이 빠져있었다”고 비판했다.

윤 씨는 “낙농인들끼리 모이면 ‘앞으로 구제역은 없다’고 한다. 누가 신고를 하겠냐는 것이다. 지금까지야 이웃에 피해를 줄 까봐 억지로 살처분했지만. 백신도 맞았는데…”라며 정부의 잘못된 보상 정책을 비꼬았다.
이번 노숙농성을 통해 얻어낸 것이 있다면 정부가 낙농의 살처분 보상 기준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이라고 한다. 농성을 하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알아줬겠냐는 것. 이제는 한국낙농육우협회를 존중하고, 대변인으로써 인정하면서 협회가 협상을 잘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20년…앞으로 20년만 있으면 ‘무쏘’라는 이름으로 혈통등록을 할 자부심이 있었다던 윤 씨. “20년 세월을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다. 그게 허무하다”는 말로 구제역으로 받은 상처를 표현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다시 꿈을 이루도록 농장을 재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빚지지 않고 일궈왔지만 앞으로는 소를 사려면 빚을 얻어야 한다. 그럼에도 윤 씨는 “난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큰 빚이 없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며 오히려 다른 축산인들을 위로한다. 

“내가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태어났으면 인정받는 사람이었을텐데…. 정직하게 열심히만 살면 되는 줄만 알았는데 국가 시책이 안 맞춰주면 꿈은 꿈으로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됐다”는 윤 씨. 정부관계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저희같은 사람이 농업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없다는 것은 농업의 미래가 없는 것”라며 짧고 굵은 한마디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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