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 입력 2011.05.02 13:57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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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탁의 봄 여름 가을 겨울 (43화)

나는 집안의 7대 종손이다. 그래서 일 년에 제사를 열 번이나 모신다. 종손이면서도 문중이니 종가니 하는 개념조차 없는 나를 아버지는 적잖이 못마땅해 한다. 문중 대소사에 일절 발길을 하지 않고, 아이 이름에 돌림자를 쓰지 않은 것도 당연히 곱게 보지 않는다. 종친이니 문중이니를 봉건유제의 나쁜 예로 보기 때문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데, 그래도 집안의 애경사에서 까마득히 촌수를 따져야 하는 어른들을 만날 때가 있다. 재종 당숙이거나 십촌 형, 대고모라 불리는 이들을 나는 도무지 졸가리 따져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그런 어느 자리에서 몇몇 나이든 집안 어른들이 종가에 한번 다녀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나 보다. 말이 종가일 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족보 한 질과 몇 권의 책이 전부이고 종가에 어울리는 여러 칸짜리 기와집과도 거리가 멀었다. 꽃피는 봄이 좋겠다는 논의가 이어지긴 했지만 나는 내심 사는 곳이 제각각인 노인들이 정말로 우리 집을 방문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헌데 지난주에 연락이 오기를, 모월 모일에 온다는 것이며 바로 그 날이 어제였다. 십여 명 남짓 되리라는 전갈이었다. 그 정도의 손님은 여러 차례 치러보았기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이 모처럼 종가에 오는 것이니 각별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하여 감주를 내리고 산에 가서 나물을 뜯는가 하면 생선과 육고기까지 꽤 많은 출혈을 감수하며 준비를 했다. 집 안팎 대청소에 당일 아침에는 새벽부터 부엌이 소란하였다.

열 시가 조금 넘자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맙소사, 낯익은 어른들과 처음 보는 노인이 섞인 손님들은 최종적으로 스물 한 명이었다. 서둘러 밥을 한 솥 더 안치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아내와 어머니는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집안 어른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는귀가 먹은 이들이 많아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묵은 족보를 펼쳐놓고 조상 얘기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예전에 서로 얽힌 추억담, 문중 땅을 슬쩍한 누군가에 대한 비난까지, 노인들 특유의 고집이 섞인 중구난방의 자리였다. 술이 여러 차례 돌자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나로서는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도 죽을 지경이었다. 중간중간 종손을 찾아 한사코 술잔을 건네는 이들이 있어 쉽게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옛날 책을 보관하는 상자를 내어 보던 중에 교지 한 장이 나왔다. 전에 본 적이 있는 통정대부 첩지였다. 이를 두고 노인들은 또 신이 났다. 임금이 내린 교지가 있으니 우리 집안이 대단한 양반가가 틀림없다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임진란 이후에 남발했던 공명첩들에 흔히 올렸던 벼슬이 통정대부임을 나는 알고 있다.

실제로 어떤 직책을 맡은 것도 아닌, 그저 부족한 나라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마구 뿌려댄 것이 그러한 교지였다. 사실 나는 그 자리에 모인 누구보다 우리 집안의 내력을 잘 알고 있다. 조선 말기에 돈으로 참봉 자리를 얻어 겨우 양반 행세를 해왔고 그 이전에는 중인 신분의 아전이 대대로 이어진 직업이었다.

중인이든 노비든 나로선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냈다가는 어른들에게 치도곤을 당할 분위기라 그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군이 좀 있었더라면 반봉건 투쟁의 깃발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점심을 먹고 곧바로 마당으로 자리를 옮겨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다. 먹새 좋은 몇몇 어른들은 소주에 고기를 잘도 드셨다. 부엌에서는 그야말로 설거지 전투였다. 네 개의 상에서 나온 그릇들은 산처럼 쌓여있고 아내는 예닐곱 시간째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못했다. 마당에서 나올 설거지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지금은 다만 설거지에 몰두하는 아내의 지청구가 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제사와 더불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종손으로 태어난 대가를 가끔씩은 치러야 하나보다.  /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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