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

  • 입력 2011.04.25 01:04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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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것도 한창 농사에 바쁜 봄날에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남이 운전하는 옆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풍광을 즐기기는 퍽이나 드문 일이다. 게다가 유일한 동행이자 운전자는 나이로 쳐도 거의 내 아버지뻘이고 도무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나와는 천양지차라 별로 나눌 얘기도 없다. 생각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나들이지만, 기왕에 떠난 길이니 매양 마음을 옥죌 일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차 중에는 제일 비싸다는 승용차는 과연 소음도 없이 안락하였다. 철지난 주현미의 노래만 꺼준다면 더 없이 좋았으나 그것까지 요구할 수는 없었다. 고속도로에 올라서 잠시 달리나 싶더니 곧 문경이었다. 그리고 내 눈에 그림 같은 풍경이 들어왔다.

세상에, 그렇게 온통 산을 뒤덮은 산벚나무는 처음이었다. 보통 산에도 드물게 벚나무들이 있어서 초록 가운데 흰 꽃무더기가 우뚝하지만 점령하듯 산을 덮은 벚꽃무더기는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꽃동산이라고나 해야 할 현란한 산들이 이어지고 바람에 날린 꽃잎은 분분이 도로까지 흩날리고 있었다.

뜻밖의 눈 호사를 하다가 문득, 문경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석달동이라는 마을이 떠올랐다. 문경 어디쯤에 있다는 외진 마을, 해방되던 해에 영문도 모르고 마을 주민 팔십여 명이 생목숨을 잃었다는 곳이다. 

군인들에게 죽었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어디선가 보다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똑같은 이름이 여럿이었던 것이다. 성은 다르지만 아기라는 이름들, 태어나 미처 이름도 얻지 못한 갓난아기들이었다.

석달동의 참상과 찬연한 꽃동산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슬픔에 잠기는 동안 어느새 상주 어름이다. 나주 다음으로 배가 많이 난다는 곳답게 온통 배꽃이 만발이다. 충주에는 겨우 꽃 몽우리가 섰는데 불과 수십 킬로 남쪽인 상주는 꽃뿐 아니라 연초록 잎사귀들까지 할랑거린다. 끝없이 이어진 배밭을 보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긋지긋한 열매솎기와 봉지 씌우기부터 가을까지 얼마나 엄청난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상주와 김천의 들은 넓었다. 들이 넓으면 배고픔을 면하기 쉬울 듯하나 역사에서는 반대였다. 땅이 많으면 큰 지주가 있고, 난을 당해도 먼저 탐을 내는 곳인 까닭이다. 그러니 백성들이 살기는 오히려 더 팍팍하다.

바야흐로 일제가 강토를 침탈했을 때, 허위나 신돌석 같은 의병장들이 일어나 휩쓴 곳도 이 일대였다. 그들은 이름을 만세에 남겼지만 화승총도 없이 곡괭이 들고 나섰다가 서러운 땅에 피 흘리고 쓰러진 이들 얼마였던가. 불과 백여 년 저쪽, 내 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그 세월은 그리 아득한 게 아니다.

선산, 구미를 지나며 동행자가 죽은 독재자를 칭송하기 시작한다. 구미공단이 어쩌고 수출이 저쩌고 하는 얘기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이리저리 내 머릿속을 뒤진다. 구미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엘 가면 팔자가 편다는 풍문이 중학교에 떠돈 적이 있었다.

기숙사도 공짜에 일주일에 두 번 고깃국이 나온다고도 했다. 그 말을 믿고 그리 간 동창들이 있었던가. 기억에는 없지만 갔던들 팔자가 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하, 그러고 보니 선산은 독재자의 친형이 남로당원으로 경찰서를 습격했다가 죽은 곳이다. 해방 이듬해, 역사에서 시월 항쟁 혹은 대구 폭동이라고 부르는 사건이었다.

이윽고 목적지인 대구에 도착하였다. 시내를 관통하며 나는 재미있는 두 개의 간판을 보았다. 태우철물과 거산천막. 내 고장에서는 아직 ‘종필고물상’ 정도의 유머도 생각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번화가인 동성로를 걸어 대구백화점으로 향했다. 귀에 익은 팔십년 대 운동가요가 울려 퍼지고 백화점 앞에는 이미 7,8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와 동행자는 그 행사에 참여한 길이었다.

무대에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범국민대회’라는 현수막이 펼쳐져 있고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구호가 물결쳤다. 나도 주먹을 뻗으며 그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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