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네 이야기

  • 입력 2011.04.18 10:57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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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에는 아직 쉰도 되지 않은 나이에 네 살짜리 손녀를 둔 젊은 할머니가 있다. 나보다 겨우 두 살이 많을 뿐이니까 마흔 다섯에 할머니가 된 셈이다. 경기도 어디에서 태어나 갓 스물에 다섯 살 많은 우리 마을의 총각과 중매로 혼인하여 내내 살았단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오빠보다 먼저 누이가 짝을 지어 외손녀를 본 것이었다.

마을이라야 고작 열일곱 가구에 나이로 따지자면 내가 제일 젊은 축이니까 그녀 또한 농촌에서는 청년이라고 해야 할 나이다. 청년답게 그녀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농군이다. 어렸을 때부터 농촌에 살면서 억척스런 여인네들을 숱하게 보았지만, 그녀- 마을에서는 이제 손녀의 이름을 따 소연네라고 부른다-처럼 농사일을 잘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마을은 면내에서도 빈촌으로 손꼽힌다. 농토는 거의 논인데다, 많아도 스무 마지기를 넘기는 집이 없고 과수 따위를 심은 밭도 산그늘이 짙어 수확이 시원찮다. 그러다보니 부모가 짓던 농사를 잇겠다는 자식이 없어 모든 집이 노인 가구다.

애초부터 농사를 지으려고 함께 들어온 우리 집을 제외하면, 2대가 함께 농사를 짓는 집이 전혀 없는 기이한 마을이 되었다. 그런 형편이어서 마을은 갈수록 쇠락하고 담벽이 허물어지거나 지붕이 내려앉아도 관에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속수무책인 집들이 태반이다. 전국에 그런 마을이 한두 곳이 아니겠지만 이대로 몇 년이 흐르면 마을이 폐허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런 중에도 제일 불쑥하게 살림을 꾸리는 집이 다름 아닌 소연네다. 그녀의 남편도 역시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며 가끔씩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이다. 무골호인이라는 말이 그를 위해 생겨났지 싶게 사람 좋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선대에게 물려받은 땅이라곤 양식거리 닷 마지기 논에 칠백 평짜리 텃밭이 고작이었다. 밤낮으로 땅에 엎드려 기면 호구는 해나갈지언정 셈평을 펴기엔 턱없이 부족한 터수였다.

시집오기 전까지 농사라고는 몰랐던 소연네는 일찌감치 남편을 밖으로 내몰았다. 취직을 하게 한 것이었다. 남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하는 형님은 등을 떠밀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업단지의 공장을 전전하다가 이십여 년을 지금 다니는 도축장에서 붙박이로 일을 하고 있다.

그 동안에 소연네는 혼자서 농사를 지었다. 텃밭에는 가지를 심었고 논농사는 남의 논까지 도지로 얻어 오천 평으로 늘렸다. 논농사는 대개 기계로 하고 텃밭 칠백 평이 힘에 부칠 리는 없다. 놀라운 것은 이 농사를 거의 새벽과 저녁에 해치운다는 것이다. 낮 시간에는 남의 일을 다니는데 워낙 손이 빠르고 매워 인근 과수원이나 인삼밭 등에서 상일꾼으로 그녀를 모셔간다.

소연네가 텃밭에 가지를 심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언제나 새벽 네 시면 밭으로 나오는데 아무리 여름철이라도 깜깜한 시간이다. 그런데 가지는 보이지 않아도 손으로 어림하여 딸 수가 있다. 이제는 미립이 나서 어두울 때나 밝을 때나 손놀림이 비슷하다고 한다.

텃밭과 논, 그리고 남의 일을 다니며 받는 품삯을 합치면 일 년 수입이 얼추 이천만 원이 넘는다는 자랑을 들은 적이 있다. 남편도 경력이 오래 되어 월 이백은 받는 모양이었다. 빈한한 마을에서 그 정도의 수입을 올리니 자연 살림살이에 윤기가 돈다.

손녀딸 옷도 가끔은 메이커를 사고 평평한 텔레비전을 제일 먼저 산 집도 소연네다. 그렇다고 매양 돈독에 올라 남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과는 영판 다르다. 붙박이로 부녀회장을 하며 겨우내 노인정에서 끼니를 끓여대는 것도 소연네요, 꼬부라진 노인네들 온천물 구경시키는 일도 역시 소연네다.

할머니가 된 후부터 진짜 마을의 할머니들과 은근슬쩍 말을 놓고 지내는, 노래방에선 트로트를 멋들어지게 뽑는, 내 딸이 고등학교에 갔을 때 놀랍게도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 주머니에 찔러준, 소연네가 이웃이어서 나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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