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집 풍경

  • 입력 2011.04.11 08:22
  • 기자명 한국농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릴 적부터 속내를 털어놓고 사는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흔을 넘긴 향수에 마나님의 병구완을 받다가 졸하셨으니 호상이라 할만 했다. 망인은 내 아버지가 서당에 다닐 때 훈장을 한 적이 있어서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조문을 갔다.

망자의 장자는 일흔이 다 된 노인이고 내 친구는 막내아들이다. 육남매를 두어 증손까지 가지가 뻗친 벌열한 집안이라 문상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고 무엇보다 검은 양복 입은 상주들 만해도 숫자가 엄청났다. 단 형제뿐인 나로서는 내심 부러운 광경이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고향의 어른들이며 이웃해 살던 이들을 다시 만나본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상가에 웃음소리가 드높았던 것도 호상이란 이유 말고 멀게는 수십 년 만에 만난 고향사람들 간의 반가움이 컸던 까닭이었다.

이미 삼십 년 전에 충주댐으로 수몰된 고향을 떠났던 이들의 얼굴 속에는 긴 세월의 풍파도 미처 씻어내지 못한 향수가 드리워져 있었다.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상가 분위기에서도 얼굴을 알아본 옛 이웃들이 다가와 손을 잡고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옛 고향 이야기를 소설에 자주 써먹는 편이라 꽤나 많은 사람들을 기억에 저장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기억에서 밀려나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망각의 자물쇠를 풀고 내게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자산이라고 해야 할 그 무엇을 얻은 듯해 약간의 흥분조차 밀려왔다.

나는 꼭 가야할 자리가 아니면 경조사에 그다지 발길을 하는 편이 아니다. 크나큰 나의 악덕 중 하나인데 앞으로 살면서 고쳐지려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니갈 수 없는 자리라 오랜만에 상가에 발걸음을 했던 것이고 십대 이후로는 보지 못했던 고향 친구들을 만나 얼굴조차 기연가미연가하며 술잔을 나누었다. 상가일지언정 즐겁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야 웃고 떠들지라도 그래서는 안 될 우리의 친구인 상주조차 얼굴에 웃음을 달고 때로는 호탕하게 홍소조차 터뜨리는 것이었다. 마냥 좋게 보아줄 광경은 아니었다. 옆구리를 찌르며 너무 웃음기를 띠고 있으면 네 아버지가 벌떡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한 마디 했지만 술기운까지 알알한 상주는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어렸을 적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큰 구경거리이자 일종의 잔치였다. 애어른 할 것 없이 초상집에 모여 삼시세끼를 해결해가며 질펀한 사나흘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집이라야 다들 옴팡간이라 아래위로 이웃한 집까지 덩달아 마당에 솥을 걸고 차양을 쳤다. 멀리서 온 객들은 그대로 묵새기며 삼오까지 보고서야 비로소 들메끈을 죄었다.

나는 상가에서 온종일 끓여 진국이 우러난 돼지국밥을 얻어먹는 것도 즐거웠지만 상주들을 훔쳐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였다. 지금이야 대개 검은 양복에 삼베 쪼가리를 다는 것으로 상주임을 표시하지만 그 시절엔 굴건제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지팡이까지 짚었다. 게다가 새끼줄과 한지로 온몸을 휘감다시피 하여 마치 망자를 북망으로 이끌어가는 사자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십여 명쯤 되는 상주들이 똑같은 복장으로 곡을 하는 모습은 장엄하기조차 했다. 마당에서 먹고 마시며 떠들다가도 상주들의 곡소리가 높아지면 아낙들을 시작으로 눈물바람이 일곤 했다.

나는 상주들의 복장이 주는 기이한 아름다움과 끝없이 이어지는 곡소리에 취해 상가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허긴 마을에 초상이 났는데 달리 갈 데가 있을 리 없었다. 상여가 나가는 광경은 또 얼마나 애절하고도 근사했던가.

상두꾼이 부르는 구성진 노래와 간단없이 딸랑거리던 요령소리는 아직 어른이 아니었던 우리들에게도 죽음이라는 음험한 장막 한 자락을 엿보게 하는,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이승의 가락이었다.

장지까지는 가지 못하고 밤늦게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날 정오쯤 상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친구는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아부지 떼옷 입으신다. 진짜 울 아부지가 돌아가셨는갑다. 어쩌냐, 어쩌냐.”

친구의 울음에 나도 눈물 한 줄기를 보탰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