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목장에서 100m 떨어진 한우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어요. 곧 우리 목장도 살처분하러 들어온다고 준비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런 식으로 무차별적인 살처분 정책 때문에 우리나라의 축산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 겁니다.” “차라리 백신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예방적 살처분 대상 지역에 들어가 있는 한 축산농가의 애타는 이야기이다. 이 농가는 지금 20년 가까이 낙농을 하면서 좋은 소를 만들기 위해 주력하며 쌓아올린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 직면해 있다. 유업체에서 실시하는 우수 젖소 선발대회에서 여러 번 시상하기도 했던 농가다.
구제역이 인근농장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로 애꿎은 한 낙농가의 20년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도 어디에 하소연 한마디 할 곳이 없다. 구제역의 확산방지란 국가적 목표 앞에 개인의 꿈과 인생은 정해진 보상금으로 치환하면 그만이다.
올해는 구제역뿐 아니라 각종 자연재해로 농민들이 고통의 한해를 보내야했다. 농민들의 잘못이 아니라 자연과 주변 환경에 의해 농민들이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거대한 자연과의 싸움이다. 농사는 하늘이 지어 준다는 말이 있듯이 일기와 토양 등 자연조건이 농사의 성패를 좌우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기술과 좋은 약제를 사용하고, 온갖 정성을 쏟아 부어도 자연이 도와주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올 초 이상기후로 하우스 농민들이 농사를 망쳤다. 궂은 날씨로 일조량의 부족과 과습으로 인한 성장장해 그리고 병충해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들의 피해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혼자 감당하고 말아야 한다. 초봄 늦추위에 과수 나무가 얼어 죽었다. 4~5년을 키워야 성목이 되어 수확이 가능한 과수나무가 동해로 인해 죽었다는 것은 새로 묘목을 심어도 최소한 4~5년간 그 피해가 지속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구제역으로 애꿎은 축산 농가들이 예방적 살처분 대상이라 하여 자식과 같은 가축들을 묻어야 했다. 정부에서는 시가로 보상 한다고 하나 축산 농가들이 그동안 쌓아 올린 기반을 다시 구축 하기란 역부족이다.
여기에 작년부터 쌀값이 폭락하여 농가소득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 농민 이외에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지난 가을 배추 값 폭등을 보는 농민들의 심경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간 농업을 경시하고 천대하더니 배추 값이 폭등했다고 온 나라가 들썩 거리며 큰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으니 말이다. 소비자의 목소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생산자의 애환은 외면하는 세태를 여실히 보여는 사건이었다. 결국 안정적 농업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국민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 후 배추 값이 떨어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농업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 배추 값 폭등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닐까?
유난히 재해가 많았던 올해 어느 농민도 피해 가지 못했다. 모두가 고단한 노동을 감내하며 한해를 마감하게 되었다. 올해를 마감하며 최소한 농업계에서만이라도 이러한 농민들이 고단함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한해의 막바지까지 구제역이 농민들의 속을 태우며 날로 확산되고 있다. 올해 들어와 벌써 세 번째로 발생한 구제역이다. 군사작전처럼 이루어지는 예방적 살처분도 감당할 수 없어서 백신을 접종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무자비한 살처분도 문제이지만, 골육지책으로 나온 백신접종도 반갑지만은 않다. 백신접종은 이후 발생하게 될 새로운 문제가 축산 농가들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농민들은 착잡한 한해를 마감하고 있다.
우리 모두 재해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들의 애환을 덜어주고자 얼마나 노력했나를 돌아보는 연말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농업문제를 농민 개개인의 삶의 문제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