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밭두렁에서

  • 입력 2010.10.04 15:47
  • 기자명 전용중 경기도 여주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칠순이 넘은 어머니는 오늘도 때늦은 배추모종을 심습니다. 환갑도 되기 전에 ‘ㄱ’자로 꺾어진 허리를 며칠째 펴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땅을 입에 물고서 노랗게 떠버린 배추모와 무씨를 악착같이 심고 있습니다. 이제 심어봐야 소용없다는 나의 의견은 하늘일을 어찌 아느냐는 한마디로 가볍게 무시당합니다.

어머니의 노역이 만든 가을 푸른 들녘

지독히도 내리는 비로 김장밭을 다루지 못해 정식 시기가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그나마 일찍 심은 놈들은 반 이상 녹아 버렸습니다. 나는 밭두렁에 앉아 한숨만 쉬고 있을 때에도 어머니는 그 진 밭을 기어 다니며 두 번이나 죽은 배추를 때웠습니다.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또 몇 번을 큰 소리가 오갑니다. 그때도 어머니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랬던 밭의 배추가 포기는 천차만별이지만 제법 어우러졌습니다.

어머니의 힘입니다. 미쳐버린 하늘도 이기지 못하는 어머니의 노역이 가을밭을 푸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언성 높던 늦여름의 그 밭두렁에 앉아 배추밭을 바라보는 나의 흐뭇한 심정은 그야말로 숟가락만 얹어 놓는 격입니다. 

벼 베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폭풍에 폭우에 일찌감치 넘어져버린 벼를 베어야 합니다. 작년보다 만원이나 떨어진 가격인데도 혹시 수매되지 못할까하는 걱정에 맘들이 불안합니다. 물벼수매와 건벼수매 할 물량을 의논하는 마을회의에서는 언쟁이 복잡합니다.

어르신들은 말려서 다시 농협까지 가는 것이 고생이고 남의 벼까지 베어야 하는 젊은이들 또한 건벼 수매에 대한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참들을 논쟁하다 결국은 각자 반반씩 하는걸로 결론을 냅니다. 누구나 착잡합니다. 마을회의가 끝나고 푸념들이 시작됩니다. TV에서 풍년이라니 올해도 풍년이라 또 값이 내렸다느니, 소비량이 줄어서 어쩔 수 없다느니. 품값도 건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결국 농사짓는 놈의 원죄로 결론을 냅니다. 씁쓸한 마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자신 품값도 못건지는 농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입물량의 확대와 대북지원의 중단이 작금 쌀 대란의 원인이며, 이를 주도하는 정부와 개방론자들이 문제의 주범임이 분명한데. 스스로의 무력함을 탓하며, 국민들의 무관심을 원망하며, 정부의 일방공세에 기가 죽어 이대로 가야 한단 말인가? 밭두렁에 앉아 하늘을 탓하며 어머니와 고성이 오가던 여름날이 떠오릅니다.

‘그래. 우리가 시작한 아스팔트 농사가 한두해를 보고 시작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악착같이 모종하고 씨뿌린 자만이 풍성한 가을을 맞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당장 발을 걷어 부치고 진밭으로 들어서자. 아무리 녹아 죽어도 포기하지 않고 땜빵하는 어머니의 자세를 배우자.’ 어깨를 펴고 가을밤 찬공기 한번 깊이 마셔 봅니다. 하늘에 별이 유난히도 빛나고.

떨어지는 쌀값을 잡으라니 국민들에게 밥을 더 먹으라던 정부가, 배추값이 오르니 김장을 한 포기씩 덜 담그라는 대책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냥 웃기에도 힘 빠지게 하는 놈들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