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과 시련의 농민운동 40년… 20살 전농, 승리의 역사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 20주년 기념

  • 입력 2010.09.21 00:46
  • 기자명 최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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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대회가 1990년 4월 24일 건국대학교에서 열리고 있다.<사진 : 전농 2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개방농정-국가권력 문제 본질 직감

근대 산업화를 거치며 지나치게 대외 의존적인 한국경제. 이러한 대외 의존적 경제 체질의 고착은 1980년대 들면서 개방경제체제로 흐르게 된다.

이 시기 한국의 경제는 자본의 논리가 흐르게 되고, 이에 따라 농업정책도 농업의 개방, 복합영농, 영농후계자 육성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정책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농민들은 미국의 농산물 개방 압력과 정부의 적극적 개방으로 농가경제 침체되고 이를 받아들이는 국가권력이 문제라는 것을 피부로 직감하게 된다.

이에 무력적 농민투쟁이 확산되고, 정치·반미투쟁적 성격으로 변화했으며 조직적으로는 종래의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라는 종교적 성격의 전국단위 운동 중심에서 지역으로부터 자생성과 독립성, 대중성, 연대성을 강화하는 ‘자주적농민회’가 지역농민운동 조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농민운동은 농민의 자주성과 대중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변화였으며, 농민운동의 변화추세는 농민 스스로의 운동역량 성장체험과 체험을 통해서 농민운동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운동도 전체 한국사회 문제 해결 없이 부분적인 해결은 불가능함을 의식하면서 노동, 청년운동과의 연대 문제가 제기됐다.

이 과정을 통해 농민운동은 단순한 농민의 경제적 이익 실현이나 농민 내부의 계급투쟁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농민운동은 사회 전반의 문제이며 전체 문제의 해결 없이는 농민문제의 해결이 없다는 인식의 토대에서, 그리고 타운동과 본질적으로 투쟁 대상이 같다는 면에서 민중운동으로서의 정치투쟁과 민족운동의 성경으로 일관됐다고 볼 수 있다.

농민운동이 개방농정을 투쟁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은 1984년 이후부터였다. 1984년 9월 전두환 방일반대 및 농가부채 탕감 요구 ‘함평·무안 농민대회’를 시작으로 85년에는 연인원 2만명이 ‘소몰이 시위’를 벌였으며, 86년에는 미국농축산물 수입저지 실천대회, 같은 해 11월 농가부채 해결투쟁을 벌여 나갔다.

자주적 농민회 건설

농민투쟁 과정에서 ‘정권’을 반대하는 구호가 나타났으며, 농민운동 진영에서도 ‘종교우산 불가피론’에서 벗어나 대중들이 모이는 ‘장터와 거리’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부터 농민운동은 기본생활권이나 지방권력의 중심인 ‘군’단위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특히 1984년 9월 2일 전남 함평·무안지역 농민들이 ‘농가부채 탕감과 전두환 방일반대’를 구호를 내걸고 ‘양파에 대한 지나친 농지세’와 ‘농축산물 수입’을 철회하고 ‘생고구마 전량수매’와 ‘쌀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면서 함평장터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 군단위 투쟁의 시작이다.

또한 이 시기 농민들은 교회를 활용하지 않아도 군을 단위로 하는 지역 현장조직이 독자적인 운동 단위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상의 요구와 정치적인 구호를 함께 내건 최초의 농민운동이 출현하게 됐다.

80년대 후반 농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방법도 청원에서 거부로, 준법에서 합법성 쟁취로, 일회성 투쟁에서 장기성 투쟁으로, 소수 활동가 중심에서 대중 중심으로 전환됐다.
지역의 농민운동이 군을 단위로 투쟁을 벌인 결과 적지 않은 새로운 군농민회가 창립되어 대중과 더불어 투쟁을 했다.

특히 이 시기에 농민대중의 자주적 운동조직의 전국 결집체로서 처음 등장한 것이 1987년 2월에 결성된 ‘전국농민협회’였다.
전국농민협회는 ‘보다 분명한 농민적 입장의 철저한 지향과 주체적 의지의 결단으로써 그 동안의 농민단체의 비농민적 성격을 과감히 탈피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결의함으로써 시대에 맞는 새로운 농민운동의 영역을 개척했다.

1987년 이후 농민운동의 토대가 전국적으로 뿌리를 내려감에 따라 전국적인 농민운동을 건설할 필요가 확대됨으로, 이후 농민운동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11월 전국수세대책위원회 모임 후에 ‘전국농민운동협의체 결성을 위한 간담회’가 열려 전국농민운동단체 대표자회의 소집에 합의했고, 이에 11월 24일에 열린 제1차 회의에서는 ‘준비 소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준비 소위원회 1차 회의가 열린 11월 30일에는 ‘전국농민운동단체협의회’의 필요성과 조직위상, 사업방향과 임무, 구성 및 조직원칙을 확정하고, 투쟁방향의 대강을 작성해 대표자회의에 제출키로 했다.

논의 과정에서 ‘전국농민협회’는 농민운동 통일을 위한 논의가 “협의체가 아닌 조직통일준비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12월 9일에 열린 2차 대표자회의는 전국농민협회의 이의를 찬반토론한 뒤 ‘협의체 건설방안’을 다수의견으로 채택하게 된다.

12월 26일 열린 제3차 소위원회는 “농민운동의 조직적 통일을 조속히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우선적으로 경주해야 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지를 받아들이고 향후 결성될 조직체를 ‘전국농민운동연합’이라고 이름을 바꾸기로 한다.

88년 농민운동권의 대중투쟁의 파고가 가라앉을 때를 기점으로 정부는 조직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는 89년 2.13 여의도에서 열린 농민대회와 그 뒤로도 지속됐다.
2.13 여의도 농민대회를 계기로 단일 대오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농민대중들은 농민운동의 흩어진 조직을 통일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게 된다. 당시 농민운동 조직은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총연합을 위시해 새로이 결성된 전국농민협회, 기리고 어떠한 전국조직에도 가입하지 않은 ‘자주적 농민회’들로 조직들이 나눠져 있었다.

1989년에는 1990년 단일조직 건설을 목표로 협의회를 군농민회로 전환하고 역량을 강화할 것을 주요사업으로 채택했다. 이 당시 협의회를 군농민회로 개편하는 사업은 65개 협의회 가운데 61개 지역에서 진행됐다. 나머지 4개 지역은 역량이 축소되어 개편작업을 하지 못했다.
이 힘을 모아 1990년 3월 1일에는 전국농민협회 소속 일부 군농민회를 제외한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독자적 군농민회(자주적농민회) 등 90여개 군농민회가 참가한 가운데 ‘전국농민운동연합’이 결성됐다.

전국농민운동연합은 89년 7월에 열린 쌀 값 폭락에 항의하기 위해 전국농민운동연합(준)과 전국농민협회가 공동으로 구성한 ‘쌀값보장과 전량수매 쟁취 전국수매 대책위’를 구성하면서 보다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특히 10월 25일 100여개 군조직이 참여한 가운데 ‘쌀값 보장과 전량수매 대책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그동안 분리되었던 전국의 농민 양대조직이 공동투쟁을 전개하게 됐다.

이에 11월 15일에 전국대회가 열리게 된다. 특히 이후 평가에서 전국의 농민들은 ‘전국농민운동연합’과 ‘전국농민협회’가 통일적 단일조직 건설을 촉구한다. 그리고 이 두 조직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 활동을 벌이던 ‘독자농’들은 89년 함께 전개한 ‘쌀값 보장과 전량수매 쟁취투쟁’의 평가 후 단일조직 건설을 향한 논의와 실천활동을 급격히 벌여나가게 된다.

한편 이에 앞서 1990년 1월 31일에는 전국농민운동연합(준), 전국농민협회, 독자농 전국모임에서 파견한 대표 34명이 1박2일 동안의 회의를 거쳐 전국 단일조직 성격으로 “합법공개대중조직”, “군농민회주체”, “빈소농주도”, “변혁지향”을 합의하고 2월 13일 전국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이에 2월 13일 78개군 농민회 대표가 참가해 ‘전국농민회총연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며 본격적인 준비활동에 들어갔으며, 4월 10일 준비위원회 총회에서 창립대회 일자를 4월 24일로 확정해, 1990년 4월 24일 건국대학교 강당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창립된다.

“승리하는 전농, 투쟁하는 전농”

1990년 창립된 전농은 1991년 전노협, 전농, 전대협, 전빈련, 전교조, 전민련(소위 6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1994년까지는 UR(우루과이라운드) 저지투쟁을 전개했다.

또 1993년부터 1994년까지 3백여 시민, 사회단체로 구성된 ‘우리농업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정부의 개방정책을 저지하고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해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농민들은 전농을 통한 전국적 조직력과 지도력으로 정부의 개방정책에 대해 전면으로 맞섰다. 우루과이라운드라는 거대한 외풍과 농어촌발전종합대책(농발대)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포기정책, 의료보험, 쌀 수매 등 농민들의 요구는 지역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분출됐다.

특히 1994년 UR저지 투쟁은 국회비준 저지투쟁으로 집중됐다. UR협상의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농민들의 투쟁은 국회의원 사무실, 농성, 야3당 장기점거농성, 민정당 당사 타격투쟁, 천만인 서명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1994년 2월 전국농민대회는 9개 농민단체가 공동으로 대회를 준비한 것이었다. 4만명의 농민들이 대학로에 모여 본대회를 치렀고, 최소한의 농업보호 대책도 없이 WTO 가입비준을 강행처리하는 것에 분노한 농민들은 본대회 직후 재협상을 요구하며 광화문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2월 농민대회는 건국이래 가장 큰 전국대회였으며, 농민들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UR 반대투쟁은 비록 WTO 국회비준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WTO 이행특별법 제정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농민·시민단체들과 연대를 형성하게 됐다.

이후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농민대중을 하나로 결집시켜 냈으며, 향후 투쟁의 과제를 미국에 대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4년의 긴 투쟁을 통해 전농은 현장 농민들과 결합된 ▷나락적재투쟁 ▷골프장반대투쟁 ▷잎담배전량수매투쟁 ▷의료보험개혁투쟁 ▷농협개혁투쟁과 민주주의 쟁취투쟁을 함께 조직, 전개하면서 농민운동의 대중화에 있어 급진전을 이루어 냈으며, 그 과정에서 전농은 민족민주운동에서 중요한 조직으로 자리잡게 됐다.

어려워지는 농업·농민·농민운동

1994년부터 1998년까지 WTO를 둘러싸고 이행특별법시행령 제정을 요구하는 투쟁과 농정개혁, WTO반대투쟁을 벌이는 한편, 새롭게 출범하는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시각의 차이,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운동의 우경화와 함께 농민운동도 시련을 받게 된다.

기나긴 UR 반대투쟁이 UR 국회비준과 WTO이행 특별법의 제정으로 일단락되면서 농업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30년 동안 지속되었던 개방농정의 영향은 상업적 전환과 함께 농업이 급속도로 몰락하면서 농민들의 노동 강도는 강화됐다.

UR협상이후 국내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WTO이행특별법은 시행령이 만들어지지 못한 채 사문화 되어갔고 농산물 수입급증으로 식량자급률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농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는 과잉생산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결국 농가부채에 허덕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민들이 농업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자, 이농이 촉진되어 농가인구가 감소했다. 이에 국가경제에서 농업의 가지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UR이후 허탈함으로 인해 한동안 침체에 빠진 전농은 이의 대응책으로 1995년에 변화된 상황에 조응하는 활동과 투쟁을 실천할 것을 결의하며, 전국 집중 투쟁보다는 군, 도의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실천활동을 해 나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지역 활동으로는 만냥고추, 청운무종자 피해보상투쟁, 사과 제값받기 투쟁, 골프장반대, 쓰레기장 반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에 전농은 사업 중심을 전농의 농민적 대표성과 정치적 지위를 조화시켜 “농민을 위한 전농, 농민을 대표하는 전농”의 슬로건으로 결의를 모았으며, 이에 근거해 사업도 경제사업을 활성화, 협동조합참여, 지역운동영역 개척 등 과거에 비해 다원화, 다양화 되어 갔다.

‘지도부사퇴’, 시련 맞는 전농

전농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이후 지도부가 김대중 정부에 대해 투쟁과 협력을 병행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정부에 대한 명확한 투쟁의 방향과 계획 아래에 농민대중들을 이끌지 못했다는 평가로 인해 지도부가 사퇴하는 조직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99년 2월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되고 현재 전농의 기치인 ‘투쟁하는 전농, 승리하는 전농’을 중심으로 현장을 강화하기 위해 지도사업을 백방으로 전개하는 한편 민족민주운동전선을 확대 강화하고 발전시키는데 제 역할을 되찾게 된다.

새로운 지도부는 전국 순회를 전개함으로써, 면지회의 행사, 회의부터 시작해 지역의 일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순회길에 올랐다.

이를 통해 지도부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기풍이 현장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전농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구호도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농민운동 외연적 확장 시기

1999년에는 농민대회와 민중대회의 결합을 통해 농업문제 해결의 외연을 확장시키면서 부문연대 투쟁에 집중했다. 매년 노동자와 농민이 따로 전국대회를 개최했지만, 이후에는 함께 민중대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합의했고, ‘민중대회위원회’를 구성해 매년 하반기 투쟁은 노농연대를 중심으로 전 민중투쟁을 준비했다.

이 투쟁으로 인해 이후 ‘상설적 공동투쟁체’ 건설의 문제가 논의됐고, 이는 장차 모든 운동진영을 하나로 모으는 ‘전국민중연대’를 결성하는 밑거름이 됐다.

2000년 농가부채특별법 제정 투쟁은 21개 농민단체로 하여금 ‘농가부채특별법 제정을 위한 농민단체협의회’를 결성토록 했으며, ‘농민단체협의회’는 1999년 협동조합개혁투쟁으로 분열된 농업계를 하나로 집결시켰고 이어 단체장들의 단식농성과 함께 두 차례에 걸친 시·군 동시다발 ‘농민총궐기’투쟁을 전개했다.
농정파탄에 대한 책임을 농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했던 정부의 정책에 농민들은 농가부채 해결 없이는 농업회생의 길도 없다는 절박함으로 투쟁했고, 12월 12일 한나라당과 국회본관 한나라당 원내총무실을 점거하면서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농민들의 이러한 투쟁은 정부로부터 ‘농가부채특별법’을 쟁취해 냄으로써 일단락 됐다. 농민단체들의 공동투쟁은 그동안 서로간의 반목을 해소했고, ‘농민단체협의회’가 결성되어 농민운동 진영과 생산자 단체가 농업, 농민문제 해결을 위해 공동대응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민족·통일농업을 본격 구상

2000년 6.15선언으로 전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 진영은 남과 북이 안팎에서 밀려오는 요인에 의해 농업이 초토화 되면서 상호교류를 통한 농업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남북농민교류사업’이 본격화 됐다.
남쪽에서는 북의 이상저온 현상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못자리비닐 모내기 운동을 전 국민적으로 추진했다.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단기간에 4억원을 모아 비닐을 제작해 북의 조선농업근로자동맹에 못자리 비닐을 전달했다.

이 사업과 남북농민통일대회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면서 농업의 통일과 민족분단을 종식시키고 통일이후 국가의 농업을 위한 방안들을 모색했다.

전농은 이 사업을 통해 농민과 통일, 민족농업과 통일농업의 방안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1년 진행한 ‘6.15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남북농민대회’는 1천3백여명이라는 대규모의 남과 북의 농민들이 금강산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일이 성사되기도 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30만 농민대항쟁

전농은 농민들을 더욱 절망 속으로 몰아가는 현실 속에서 17대 대선에서 농업·농민문제를 전면화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30만 대항쟁을 결의하고 선포했다.
‘우리농업회생연대’ 주관으로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운동이 진도를 시작으로 100일간의 전국순례가 시작됐으며, 각 지역에서는 30만 농민대항쟁을 성사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조직화 사업에 들어갔다.

아무도 성공여부를 점칠 수 없던 30만 농민대항쟁은 전 이장단의 쌀개방반대선언 운동으로 전개됐다. 이 운동에 전국의 6천8백명의 이장들이 참여하면서 30만 농민항쟁 가능성은 현실화 되어 갔다.
이장선언에 이어 농민회원들의 호별방문 선전전은 전 농민에게 선전지를 돌린다는 각오와 목표로 진행됐다.

2002년 11월 13일 제주에서 강원도 철원까지 전국의 모든 관광버스가 동원된 농민대회는 서울을 압도해 갔다. 차량만 2천645대로, 버스기사들만 모여도 집회가 이뤄질 정도였다.
여기에다 10만여 농민, 노동자, 학생, 시민 2만여 명 등 총 12만여 군중이 모인 여의도 고수부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렇게 30만 농민대항쟁은 갑오농민전쟁 이래 가장 많은 농민대중이 참여한 농민운동 역사상 길이 남을 투쟁이었다.

이 30만 대항쟁을 통해 농민들은 ‘전농이 결심하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획득했다. 지도부는 대중을 믿고, 현장은 중앙의 방침을 철저히 집행하는 일심단결의 작풍이 꽃피워낸 것이 바로 30만대항쟁이라고 볼 수 있다.

겨울 물대포, 정치세력화 결의 다져

한·칠레 FTA를 저지하기 위한 농민들의 투쟁은 처절했다. 농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2002년말 한·칠레 FTA를 타결시켰다. 전농은 이에 2003년 130여일에 걸치는 상경투쟁을 비롯해 갖가지 전술을 구사하며 국회비준 저지투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총선을 앞둔 2004년 초 농민들의 절절한 요구를 외면한 채 한·칠레 FTA 국회비준동의안을 상정해 강행 처리했다.

엄동설한에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가며 싸웠던 수천의 농민들은 이 정권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을 곱씹으며 결의를 다지게 된다.
2000년 1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창당했고 전농 내에서도 농민이 정치권력의 주인이 되어 신자유주의 농업을 분쇄하자는 기조의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조직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뜻을 피력했다.
전농 조직내부에서 지역별로 정치적 견해 차이와 농민운동의 진로에 대한 우려가 존재했지만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2003년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을 통한 전농의 정치세력화를 결정하게 된다.

2004년 총선에서 농민출신 강기갑 의원과 현애자 의원이 비례대표로 당선되면서 농민정치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고 지방선거에서 지방의원들의 당선, 당원확대 등의 정치적, 조직적 성과를 내게 된다.  하지만 현재까지 당 정치활동에 대한 인식과 조직 내의 의견 차이는 여전히 중요하게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

쌀 투쟁…경찰력에 농민들 사망

UR협상 타결 이후 10년이 지난 2004년에는 쌀관세화 유예협상에 대한 재협상이 진행됐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4월 재협상을 선언하고 비공개로 협상을 독단적으로 강행해 나갔다.

이는 실패한 쌀 협상의 결과를 가져오게 됐고 그 결과 사상 유래 없는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국회청문회가 열리게 됐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식량주권을 지켜내고 통일농업의 교두보를 확보하느냐 마느냐의 대결전에서 농민들의 치열한 투쟁이 진행됐다.

2005년에도 쌀개방 저지 투쟁은 쉼 없이 계속됐다. 4월 쌀 협상의 이면합의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정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해 국회청문회까지 만들어낸 것을 시작으로 6.20 농민총파업, 9.10 전국농민대회, 11월 15일 국회 앞 전국농민대회, 11월 23일 고속도로 상경 투쟁과 대규모 야적투쟁을 진행했다.

 그러나 쌀개방 협상이 국회비준에 이르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많은 농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급기야 11월 15일 대회에서는 방패와 곤봉을 앞세운 노무현 정권의 폭력에 의해 두 농민이 죽음에 이르게 됐다.

고 전용철, 홍덕표 열사의 죽음으로 쌀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수많은 단체들이 함께 묶여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투쟁함으로써 대통령의 사과를 받고 경찰청장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농민연합·새로운 전망 필요

농민단체 사이에서 연대투쟁의 성과와 필요성에 의해 2006년 품목별 단체를 제외한 전농, 전여농, 한농연, 한여농 등 11개 단체가 농민단체들의 상설적 연대체인 ‘농민연합’을 발족했다.

농민연합은 전국 규모의 조직으로 사안에 따라 단체간의 입장차이도 있으나 사소한 차이는 연대의 틀을 공고히 하는 노력 속에서 극복되어져야 하며 새로운 세상의 농업을 만들어 가기위한 연대의 질을 아래에서부터 더욱 높여야 하는 정치적, 조직적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 정부의 분열공작으로 몇 개의 농민단체가 농민연합을 탈퇴하면서 이러한 한계를 풀기위한 노력과 농민연합의 새로운 전망이 더욱 제기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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