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서 확인한 민초들의 지향점을 따라갈 것

인터뷰 - 정 정 섭 도의원

  • 입력 2010.07.26 08:48
  • 기자명 연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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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에서 최초로 통일쌀을 경작한 정정섭 도의원. 이번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이 된 그는 24년간 농민운동을 통해 지역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난시청 싸움을 통해 시청료를 내지 않게 했으며 노동조합과 화엄사와 자매결연을 통해 통일쌀도 짓고 있다.
무소속으로 초선인 정 의원은 도의회에 입성하자마자 농수산위원회 간사를 꿰차고 앉을만큼 당돌한 면모도 갖고 있다. 20일 전남도의회 정정섭 도의원사무실에서 만났다.  
  〈연승우 기자〉

▲ 정정섭 전남도의원

-농민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구례가 고향이다. 면단위로는 타지다. 87년도 수배생활을 할 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례 산골짜기에서 숨었다. 87년 6월항쟁이 끝나고 운동의 전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노동계에서는 위장취업이 많던 시절이었다. 당시 지역운동을 고민했다. 농민 속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구례를 농민들이 주도하기 때문에 농민운동을 하면서 지역운동을 고민했다.
구례로 와 지리산 청년회를 만들었다. 과거의 가톨릭농민회 조직을 해소하고 농민회를 만들던 토대가 됐다. 20여년전 농민회 막내였는데 아직도 막내다.

- 무소속 후보로서 선거운동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구례에서는 젊은 사람을 뽑지 않고,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은 안 되는 분위기였고 돈도 없고 읍내 출신이 아니라 선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선거운동에서는 이 네가지가 정반대로 됐다. 농민회원들이 젊고 야물어서 좋다고 선전하면서 ‘농민이 살아야 구례가 산다’고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구례군은 2명의 도의원을 뽑았는데 이번 지방선거에서 1명으로 통합됐다. 원래 2선거구를 준비했었는데 고민이 많았다. 민주당 현직 도의원 출신과 맞붙어 진다고 생각했지만 젊음과 농민을 내세워 결국에는 읍내와 6~70대 층에서 지지를 받았다. 선거를 6월항쟁 치르듯 했다. 

- 지역에서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
24년 동안 활동을 해왔다. 2007년 쌀문제로 농협과 싸웠고, 산수유가 수입될 때 수입을 체류시켰다. 또 구례에서 3백여명이 시청료를 내지 않게 했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과 화엄사와 자매결연을 해 구례쌀을 납품하고 있으며 함께 통일쌀도 짓고 있다.

- 무소속 출마로 농민후보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지역에서 당으로 가야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전농의 결정사항이다. 선거 7개월전에 구례군농민회에서 무소속 출마 합의를 봤다. 내부에서 선거를 나가는 이유는 권력을 잡기 위한 것이다. 선거는 당선이 최우선이다. 구례에서는 민주노동당 지지가 소수이다. 농민후보로 나가면 민노당 지지를 다 포괄할 수 있었다.
민노당으로 나가면 한 번 더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민노당으로 나가지 않으면 전농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당원만 전농 후보로 선거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인가. 농민회보다 폭넓은 대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했다.

선거운동원 1백여명이 120%의 실력을 발휘했고 열심히 했다. 후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희망과 분노가 표출된 것이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이다. 구례에서 39% 지지를 받은 것은 민초들의 지향점을 확인한 것이고 지향점을 향해 가는 길에 민노당이 서 있는 것이고 큰길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 향후 민노당으로 입당할 생각이 있는지
2012년 4월에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의 입장이 민주대연합의 조짐이 있다면 선택의 여지가 있다. 지역에서 무소속이라 찍었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당을 선택하게 된다면 지역의 여론을 들어야 한다는 충고도 들었다. 민주노동당 중심으로 새롭게 개편된 정당에 대한 고민도 있다. 아직 결정한 것은 없고 고민을 뒤로 미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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