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기의 농사이야기

너구리 와 땅에 묻노, 뱃속에 묻어야지

  • 입력 2007.10.22 09:48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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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⑧

 

너구리 와 땅에 묻노, 뱃속에 묻어야지

 

오랜만에 ‘녹전 카페’에서 연락이 왔다. 카페 주인 젊은 새댁 장군이 엄마가 좋은 ‘괘기’ 있다고 빨리 오시라는 데요, 한다. 하늘을 쳐다보니 해는 그야말로 노루꼬리만큼 남았다.

애호박이나 따 먹자고 집 앞 복숭아밭둑에 대여섯 포기 심었던 것인데 늙은 호박이 풍년이다. 경운기 적재함에 그득하게 실었는데도 어머니는 수풀에서 누렇게 익어 인물이 훤칠한 놈들을 연신 꺼내놓으신다. 지난여름, ‘범 나올까봐 무서워 못 들어가겠다’고 몇 날 며칠을 역정만 내시더니 그 풀을 다 잡고도 아예 발걸음을 끊었는지 어머니도 연방 감탄이다.

호박을 마루에 들여놓고 오랜만에 애마 오토바이를 몰아 점방으로 달려갔다. 대충 인사를 끝내고 좁은 자리를 빈줄러 앉자 다짜고짜 소주잔부터 들이민다.

“오늘이 무슨 날이가?”

“니 올해 농사 고생했다고 내가 개 한 마리 붙들어 맸다. ‘괘기’나 마이 묵어라.”

카페 주인 젊은 새댁 장군이 엄마가 김이 무럭무럭 솟는 ‘괘기’ 한 접시를 가져온다. 나는 젓가락을 들이대는 순간 개고기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냄새도 촌수가 영 멀다. 그러나 고기는 쫄낏 쫄깃하고 맛이 썩 괜찮다.

“멍멍이가 아인데?”

나는 중환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녀석은 낄낄거리기만 할뿐 말이 없다.

“뱃속에 넣어두면 약 된다. 묻지 말고 묵어라.”

나는 ‘괘기’를 씹으면서도 기분은 영 찜찜하다. 이놈의 ‘괘기’ 족보나 알아야 그 맛을 즐길 수 있는데 아무리 추측을 해 보아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찡그린 내 표정이 보기 싫었던지 춘만이 형님이 빈 잔을 건네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설명을 한다.

“너구리다. 병환이가 사래들에서 나락 비다가 콤바인에 다쳐 다 죽어가는 걸 논바닥에 버릴 수도 없고 땅에 묻을 수도 없는데 가까이 있던 춘기 아재가 알고 갖고 와서 삶었다 아이가. 마이 묵어라.”

너구리! 나는 갑자기 감탄을 한다. 가을 너구리! 불콰해진 중환이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너구리를 와 땅에 묻노, 뱃속에 묻어야지.”

아 저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문득, 몇 해 전 내가 시집을 내었을 때 출판기념회를 핑계삼아 술 마시러 온 부산의 한 시인이 우리 집 마당에서 염소고기를 먹으면서 ‘염소를 우째 땅에 묻노 뱃속에 묻어야지’ 라고 너스레를 떨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비로소 얼굴을 펴고 부지런히 ‘괘기’를 뜯었다. 유리창 밖으로 가을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늙은 애들은 고마 가자. 젊은 어른들이 마이 잡사야지.”

춘기 형님이 일방적으로 환갑 지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밖으로 내몰았다.

50대들은 더 잡숫고 가라는 너구리같은 헛 인사만 한 마디씩 내뱉고 만다. 60대 늙다리들이 빠져나가자 50대 네 명만 남아 저마다 담배를 한 대씩 빼물며 느긋해진다. 빈 술청에 귀뚜리가 울었다.

소피보러 가는 길에 불별이 흐르고, 귀뚜리는 외계로 부지런히 가을밤을 타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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