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11월 11일에 뵙시다

농촌으로부터의 편지

  • 입력 2007.10.22 09:44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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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기억나요?

▲ 소희주 경남 진주시 지수면
2002년 여름 어느 금곡 장날, 우리 언니들이 방송차량 위에 탑승하여 사회 보고 연설하며 우리가 어떻게 농촌을 지켜내야 하는지, 왜 여성들이 나섰는지 째지는 목소리로 연설하고 서명 받으러 나섰던 일. 반성 장날, 한 언니가 혼자서 이마에 ‘한·칠레 FTA 반대’ 종이를 붙이고 장을 돌아다니더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전해졌던 일.

처음 해 보았던 장날 선전에 긴장도 많이 되었지만 그래도 해내었다는 자신감이 더 컸었지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막았던 것도 아마 2002년이었던 것 같아요.

톨게이트 입구에다 트럭을 대어놓고 경찰들 기죽인다고 북, 장구, 징, 꽹과리를 메고 얼마나 신나게 쳐대었던 것 기억나요?

너무 더워 막걸리를 몇 말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징소리에 사람들이 또 모여들고, ‘어디 톨게이트에서는 농민대열이 뚫었다더라’는 하나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또 다시 꽹과리로 대열을 가다듬으며 진짜로 신명나는 데모판을 벌였던 것도 기억나지요?

농민회 간부들이 이장들을 만나러 마을로 들어가고, 찌그러져가는 천막 뒤에 방범초소에 앉아 닭똥집 구워먹으며 “농민회 욕만 하고 다니는, 지역에서 대표 보수로 평가받는 이장이 이번 대회에는 마을에서 차 한 대 낸다고 했다더라.” 그러면 “우쩐 일이고, 인간 됐네” 하면서 웃음꽃을 피워내었던 것 기억나지요?

그 이장들이, 농민회라 하면 쌍수를 들고 반대하고 나섰던 사람들이, 2002년 여름부터 무르익었던 우리들의 투쟁으로 어느덧 자신이 투쟁의 주인이 되어 나서게 되었던 거, 그거 기적 아니예요?

우리가 무엇으로, 어떻게 그 사람들을 설득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스스로 그것을 느껴 함께 우리의 대열에 동참할 때까지 힘들었지만 꾸준히 우리의 노력들이 결실로 이어진 것 아니겠어요?

동네마다 젊은 사람들이 3만원씩, 5만원씩 찬조하여 음식 준비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차비로 5천원씩 거두어서 또 남은 돈으로 돌아와서 돼지고기 삶아 뒷풀이까지 이어졌던 시간들. 우리는 맨날 지는 싸움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바로 이기는 싸움이었네요.

언니! 진주의 모범을 듣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진주가 다시 모범으로 서 달라는 주문이겠지요.

그 사이 언니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아버님은 우울증이 더 심해지셨고, 또 이전보다 몇 동은 더 늘어난 하우스에 일꾼은 없어 지치도록 일해야만 하는 언니를 붙들고 제가 100만 항쟁 한번 승리해보자고, 그래야지만 언니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언니, 어제 여농 상임위에서 이제 더 이상 말만 하지 말고 사람들을 만나러 들어가자, 당장 간담회라도 시작하자, 마음을 모았습니다.

간담회로 사람이 안 모인다면 이전처럼 집집마다 방문해야지요.

한 명의 결심한 동지가 14대를 모았던 미천면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갈 공간이 없어 휴게소 갓길에 차를 줄줄이 주차시켜 놓고 길가에서 주먹밥을 먹으며, ‘야, 니들 몇 대왔냐?’, ‘금곡면 1, 2, 3, 4, 5, 6, 7, 8........16? 우와’, 차량번호가 두자리인지 한자리인지로 서로를 평가하며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의기양양했었던 5년전, 그때의 그 장면이 바로 한달 뒤 우리가 다시 느끼게 될 11월 11일일 것입니다.

그 날엔 언니도 하우스 두 집 건너 한 명씩만 남기고 투쟁의 현장에서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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