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는 날

  • 입력 2010.06.07 14:42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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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새 일당 사만 원짜리 일을 하고 있다.

복숭아 열매솎기 작업을 하러 다니는데 농사지은 지 십육 년 만에 남의 집 일 다니기는 처음이다. 다 지난겨울의 이상 한파 탓이다. 해마다 보름 정도를 사과와 복숭아 열매솎기에 매달리는데 올해는 일주일만에 끝이 났다. 절반 넘게 동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봉지를 싸기 전까지 십여 일 남짓 일손이 남고 담뱃값도 아쉬운 처지라 일을 다니게 된 것이었다. 내남없이 천재(天災)를 입은 농민들 속은 숯덩이 같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투표이야기를 하고 싶다.

옆 마을에 주인이 병으로 앓아누운 복숭아 과원으로 일을 다니는데 마을의 아주머니 네 명을 내 차에 태우고 함께 간다.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을 시작하여 오후 여섯 시까지 작업을 하는데 바로 오늘 투표일이 문제였다.

어제 계획하기를 다섯 시 오십 분 쯤에 투표장에 가서 기다렸다가 시작과 동시에 투표를 한 다음 일을 가기로 했다. 한둘도 아니고 여덟 번이나 찍어야 한다니 일찍 서두르자는 거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채 여섯 시도 되기 전에 투표장에 도착해보니, 세상에, 그 이른 시간에 면사무소 밖에까지 그야말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들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일찍 투표장에 나온 것이었다. 그 줄 끝에 서 있다간 어느 하세월에 투표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의 집 일을 가는 처지에 그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일단 투표를 포기하고 과수원으로 갔다.
아직 주인도 나오지 않은 밭에서 우리는 이십 분이나 일찍 작업을 시작했다. 점심 먹고 나서 잠시 쉬는 짬에 투표를 하자고 의견들이 모아졌지만 점심시간이라고 상황이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역시 그 시간에 사람들이 몰릴 테니까.

날이 날인지라 일하면서 나누는 대화도 선거 얘기가 많았는데 가만히 듣자하니 네 사람이 마음에 두고 있는 후보자가 다 같은 당, 같은 사람이었다. 그 당은 내가 개인적으로 같은 하늘 밑에 살고 싶지 않은 정당이어서 조금 우울하였다.
그렇잖아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앞서가는 그 당을 지지하는 네 명의 유권자는 어떤 이유를 대도 마음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단 한 번도 투표에 불참해본 적이 없었고 역시 늘 여당을 찍었다고 했다. 그때 퍼뜩 ‘물귀신 작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투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나 하나를 희생하여 네 표를 막아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아주머니들보다 먼저 점심을 뚝딱 해치운 나는 조용히 차를 몰고 투표장으로 향했다. 애석하게도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기왕 작전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은 마당이었다.
“하이고,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오늘 투표하기는 어렵겠는디요.”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드는 나를 보고 아주머니들은 적잖이 당황하였다.

“어떡한디야? 투표는 꼭 혀야 되는디.”
“에이, 뭐, 우리가 안 해도 될 사람은 될 것이구만요.”
작전은 거의 성공하는 듯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아주머니들이 안절부절이었다. 네 시가 넘자 이장한테서 전화까지 왔다.
“큰 탈났네. 우리 동네서 우리만 안즉 투표를 안 했대여. 이걸 어째?”
“이러다 우리 잡혀가는 거 아녀?”
칠십 대 노인은 잔뜩 겁까지 집어먹었다.

몇 해 전만해도 마을 앰프에서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 이름을 불러대곤 했었다. 내가 걱정 말라고, 국민들 절반쯤은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안심을 시켜도 아주머니들의 불안은 점점 심해갔다. 다섯 시 반이 넘자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아주머니 하나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요, 오늘 한 이십 분 먼저 나와서 일을 했어유. 그걸 따지자는 건 아니구유. 오늘이 투표니께 지금 좀 가봐야겠어유. 아, 그럼유. 낼까지는 끝낼 거구만유.”
서두르는 아주머니들에게 더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면사무소에 도착하니 마감 십분 전이었고 이장이 밖에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황급히 투표장으로 들어가는 아주머니들을 따라 나도 지갑을 뒤져 주민증을 찾았다.

거의 성공할 뻔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약력=소설가 최용탁은 충북 충주에서 16년째 사과와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소설집 ‘미궁의 눈’ 평전 ‘계훈제’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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