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알리바이

  • 입력 2010.05.03 08:57
  • 기자명 한국농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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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가 내리고 있다. 우리는 점심때가 막 지난 시각부터 밥집에 앉아 밥 대신 소주잔을 뒤집고 있었다. 복사꽃을 작살내는 굵은 빗줄기에 곤두세우던 신경도 소주 몇 잔을 들이붓자 끝이 무디어져 밖은 내다보지도 않는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올 복숭아농사는 흉년이라고 일찌감치 예단을 해버린다. 나는 그럴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아 어느 쪽으로도 단언을 할 수가 없다. 오늘 내일을 마지막으로 경봉과 천중도가 만개를 할 것이다. 그런데 일교차가 너무 심하고 이 드센 빗줄기는 무릉도원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꽃가루 세 봉지를 구해 겨우 한 봉지만 사용했을 뿐인데 드센 바람과 비가 작업을 가로막고 있으니 볼 장 다 보았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종문이가 고3인데 걔한테도 사립대학은 허용하지 않을 작정입니까?”

울산에 살면서 출장차 고향에 온 후배가 맥주에 소주를 섞으면서 느닷없이 물어왔다.

“지하에 계신 울 아부지가 오셔서 권해도 그건 양보 못 하지.”

“그래도 형님 아아들은 참 행복합니다. 아니면 형수 사고방식에 무슨 문제가 있거나.”

 후배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 때문에 학원비를 매달 1백만 원 가까이 탕진하고 있다고 소태 씹은 표정으로 말을 했다. 학교 성적은 어느 정도냐고 물었더니 중간에서 맴돌기만 하지 더 이상은 상승하지 않는다며 말꼬리를 흐린다.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후배는 학생시절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는 편이었으나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노력하는 모범생이었지만 공부 머리는 신통치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술을 꾹 물고 있다가 후배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툭, 뱉고 말았다.

“아바이 닮았으면 생각을 바꾸지. 그런 식으로 쏟아 부으면 한 살림, 금방 날아 가버려.”

“만약에 아아들 어마이한테 그렇게 말했다간 나는 뼈도 못 추려요.”

“아이큐 90짜리를 쌔가 빠지게 가르친다고 130짜리로 만들 수는 없잖아, 다소의 상승효과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부질없는 짓을 왜 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해. 우리는 정치보다 먼저 아줌마들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어.”

거친, 이 말은 자칫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지니고 있다. 함부로 지껄이다가는 콧등이 깨지는 사건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인즉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삼류대학 들어가기도 빠듯한 아이에게 일류대학 들어가길 종용하는 아줌마들의 극성이 오늘날 대학입시 문제를 이렇게 엉망으로 흔들어버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식들이 아득바득 공부를 하겠다고 설친다면 또 모를까, 공부하기 싫다고 하는 놈 코를 꿰어가지고 억지로 물가로 끌고 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배워서 버리더라도 배울 때는 배워야 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가 아니다. 대학원까지 해서 청소부를 하는(그들을 비하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세상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잘못 산 내 인생의 핑계며 아들들에 대한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나는 자주 아이들한테 비정하게 말하곤 했다. 학문하는 사람 따로 있듯이 택시를 몰 사람도 따로 있다. 농사짓고 공장에서 일 할 사람이 있어야 펜대 굴리며 노닥거릴 사람도 있는 것이라고. 뜨거운 공사 현장과 땅에서 뒹굴며 농사짓기 싫으면 에어컨바람 시원한 사무실로 가거라. 그건 순전히 너희들 힘으로만 가능하다. 노가다를 하더라도 나는 말리지 않겠다. 똥 묻은 빤쓰라도 팔아 자식에게 바치던 시절은 할아버지 시대로 끝이 났다.

“아이고, 팔공산에는 폭설이 쏟아지는데 길이 미끄러워 식겁했다.”

밥집 주인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놋날 디룻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밥집 주인남자는 파계사에 갔다 오다가 느닷없이 폭설을 만났다고 한다.

길바닥에 눈이 엄청 쌓였다고 호들갑을 떠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나로선 가늠이 서질 않았다. 사월 이십팔일에 눈 내리는 팔공산이라니. 날씨조차 우리 교육처럼 엉망으로 비틀려버린 세월이다. 무엇 하나 비틀려버리지 않은 게 없다. 나는 맥주잔을 당겨 콸콸 채우고 수주 한잔을 들이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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