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물로도 잔은 넘친다, 부추 이야기

  • 입력 2010.04.19 13:23
  • 기자명 고은정 (사)농수산식품유통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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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꽁꽁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겨우내 땅 속에 응축되었던 양기가 스프링처럼 일어나는 계절이라 봄을 spring이라 부르는 서양의 정서에도 동양의 철학이 녹아 있는 것이리라.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니 양기가 강해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몸 안에 응축되었던 기(氣)의 순환이 활발해지고 나무(木)처럼 우리의 몸도 빠르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자연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므로 밥맛이 없다거나 나른하고 쉽게 졸린다거나 하는 등 춘곤증을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봄에 춘곤증을 물리칠 수 있는 식물들로 냉이, 쑥, 돌나물, 취나물, 두릅 등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중에 으뜸을 꼽으라면 단연 부추다.

부추는 한의학에서 구채라고 하는데 양기를 북돋워 준다하여 기양초(氣陽草)라고도 부른다. 매운 맛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성질이 따뜻하고, 동의보감에서는 간과 신장을 이롭게 하는 식물로 분류하고 있다. 신(腎)이 허(虛)해서 오는 양기 부족이나 위가 냉해서 오는 복통(胃寒腹痛)에 효능이 있음은 물론 허리와 무릎이 시고 아픈데도 효과적이며 해독하는 작용도 뛰어나다. 그러므로 봄에 막 올라오는 부추를 잘라다가 밥상에 올린다면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우리의 몸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것임에 틀림없다.

부추의 씨도 가구자 또는 구채자라 하여 약용으로 사용한다. 정력을 강화하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여 허리가 아픈 증상이나 무릎을 튼튼하게 만드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또 정액이나 소변이 쉽게 흘러나오는 것을 억제하는 효능도 가지고 있어서 밤에 소변이 잦거나 야뇨 증상이 있는 경우나 아랫배가 차거나 뼈가 시리고 아픈 증상에도 쓰인다.

어린 시절 외가에 가면 뒤뜰 장독대 돌 틈마다 하얀 꽃을 달고 있는 부추를 볼 수 있었다. 바지런하셨던 할머니께서는 한 뼘 정도 자라면 잘라다 집에서 담근 간장에 무쳐도 주시고, 오이가 나올 때면 오이소박이로 만들어 주셨고, 비오는 어떤 날에는 전을 부쳐 주기도 하셨다.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던 많은 음식들 중 결코 잊지 못할 음식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부추죽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느 무렵이었는데 배가 아프고 설사가 나서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런 내게 할머니께서는 파란 색이 예쁜 부추죽을 쑤어 주셨는데 그 죽을 먹고 한잠 자고 일어나니 말끔하게 나았었다. 그날 이후로 부추죽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약이 되는 음식’이 되었다. 한글도 모르는 할머니께서 뒤란 장독대에 심으신 부추가 실은 ‘가정상비약’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약을 꼭 가려서 먹어야 하듯이 약성이 강한 음식일수록 먹지 않아야 할 사람과 먹지 말아야 할 때를 가려야 한다. 요 며칠 바쁘게 지내던 나는 입에서 당기고 몸에 좋다며 가리지 않고 마구 먹은 음식으로 혹독한 값을 치렀다.

봄을 타서 그런지 입맛이 없던 내 눈에 막 올라온 부추가 보여 베어다가 나물로 무쳐 비빔밥으로 해먹고 탈이 났던 것이다. 뒷머리가 당기면서 아프기 시작하더니 온몸에 열이 나면서 어깨는 내려앉을 듯 무겁고 옆에서 말을 거는 사람에게 이유도 없이 화를 냈다.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른다하여 곰곰 생각해보니 최근에 받은 스트레스로 입이 마르고 찬물을 찾던 내가 먹은 부추가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잔을 넘치게 하듯 우리 몸에 좋지 않은 기운이 잔뜩 쌓였을 때 먹는 음식 하나로도 큰 화를 부를 수 있으니 정말 조심할 일이다.

장독대에 부추를 심어놓고 먹는 사람과는 양기를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 이 봄에 양기가 부족하다 싶으면 부추를 열심히 먹을 일이다. 유난히 금슬이 좋으셨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은밀한 비밀도 장독대의 부추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고은정 (사)농수산식품유통연구원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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