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 20년사 편찬위원장님께

  • 입력 2010.04.19 13:06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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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 20년사 편찬위원장님. 거기, 해남에는 꽃이 지고 있다지요? 여기, 영천에는 벚꽃이 만발을 했습니다. 저 망할 놈의 ‘사꾸라’만 바라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던 나이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버렸지만 꽃은 언제 보아도 마음을 달뜨게 합니다.

어제, 미친듯이 들이치던 바람이 오늘은 조금 잔잔해졌지만 낮 동안 하늘은 잔뜩 흐려 있더니 저물무렵인 지금은 비와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일조량이 모자라는 바람에 농사꾼들은 한숨만 꾸역꾸역 토해내는데 도시 사람들은 농산물 값이 비싸다고 얼굴을 찡그립니다. 무슨 놈의 조화로 올해는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는지 구십 노인네들도 머리털 나고는 처음 겪는 일이라고 고개를 절래절래 내흔듭니다.

편찬위원장님. 오늘 제가 늘 해오던 대로 ‘의장님’이 아니라 이렇게 ‘편찬위원장님’으로 부르는 데에는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농 20년사(史)’ 문제 말입니다.
지난 13일 대전에서 만나 했던 말처럼, 편찬위원회는 일 년이 다 되어 가도록 그 어떤 결과물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은 모두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럴 이유가 또한 있었습니다.

다들 그 어마어마한 전농 20년사 필진이 되라는 느닷없는 제안을 끝까지 뿌리칠 수 없는 조직의 문제,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없는 중압감과 도저히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는 밑그림, 고구마나 감자처럼 줄기가 당기면 줄줄이 딸려 나오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 감당이 되겠습니까. 사실 글쓰기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작업은 감을 잡는 데에도 근 일 년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둥벌거숭이인 농사꾼들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집행부에서 이 일을 진행하기 시작한 초기의 미숙했던 점도 이렇게 늦어지는 데에 한 몫을 하기도 했습니다. 꼼꼼하게 진행과정을 미리 챙겨 여러 차례의 워크샵 과정을 통해 몸에 익히도록 하는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집행부인들 뭐 쥐뿔이나 알아야 어떻게 챙겼을 것인데 그들을 탓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무엇보다 준비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작업은 이삼 년이란 시간이 주어졌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철저하게 몸에 익히고 있는 ‘빨리빨리’ 근성을 전농 20년사에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참고로『한국가톨릭농민회 30년사』는 삼 년 뒤에 나왔지요.)

편찬위원장님. 그래서 오늘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합니다. 20년사 출판기념회를 21주년에 맞추어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이야 전화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왜 이런 자리를 통해서 하느냐 하면, 오히려 이런 공개적인 제안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전농은 사월 행사를 칠월로 미루었고 그래서 칠월에는 책이 나와 출판기념회를 해야 한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을, 늦어도 연말 전, 이런 무언의 압력을 저나 위원장님이나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20년사가 급조되어서는 결코 안 될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둘러서, 에둘러서 가야할 신중한 사안입니다.
원고를 쓰는 시간 이상으로 수정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고 토론하는 공론의 자리도 넉넉하게 가져야 하며, 충분한 시간을 통해 감수를 받는 과정도 거쳐야 합니다. 그러자면 연말까지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십 년! 전농이 그 긴 세월동안 투쟁해 온 엄청난 기록들을 오롯이 모아 놓은 것도 아닙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투쟁들이 기록되지 않은 채 기억은 흐려졌고 또 어떤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불러내고 찾아내는 일들은 지난할 것입니다. 이런 제 제안이 전농 집행부에 알려 이해시키고 양해를 구하는 일이 전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영천에는 이제 막 복숭아꽃이 하나씩 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영천말로 ‘꽃은 피고 인자 우예 사꼬!’ 라는 한탄이 있습니다. 꽃이 피면 가을까지 죽을 둥 살 둥 일만 해야 한다는 한탄조의 넋두리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본격적인 일철이 시작됩니다. 무더위와 함께 장마가 오고 장마 속에서도 손을 놀릴 수 없는 형편이니 가을이 오기까지는 원고에 매달릴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위원장님,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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