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한 불화

  • 입력 2010.04.05 09:08
  • 기자명 이중기 시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틀째 또 비가 내리고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쓰려고 앉아있는데 어머니 잔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드는 빗소리처럼 마루 저편에서 슬금슬금 건너오고 있다.

“이거는 돈 아이가. 어느 늠이 돈을 거저 갖다 주나,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은 와 이래 틀어 놓고 있노. 느그는 뻐뜩하믄 늙이(늙은이) 잔소리라 카지마는 나는 그래 안 살었다.” 

일주일째, 온 나라를 온갖 추측과 예단으로 들끓게 해버린 천암함 사고 뉴스를 보다말고 아들놈 방에 와서 컴퓨터에 앉은 것이 화근이었다. 여러 날 째 삐져있는 어머니께 그만 꼬투리를 잡히고 말았다. 잘못하면 오늘 해야 할 일은 이쯤에서 종지부를 찍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경로당에라도 좀 나갔으면 좋겠는데 죽어도 그곳 출입은 오후로 못을 박아놓고 있으니 난감하기만 하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밖으로 나갔다.

불화는 며칠 전에 있었다. 그 일로 나는 삼만 원을 벌었다. 막내여동생은 그걸 ‘통쾌한 불화’라고 말해주었다.

“아이고 참, 내가 어뜩 죽어야지 큰일이다. 니는 살림을 그따구로 살어가 우얄라카노.”

저녁을 먹고 난 후, 전정하는 일로 앞집 태환이 형님 딸내미 결혼식장에 갈 수가 없어서 부조봉투를 좀 갖다 주라고 했더니, 그 봉투를 내 앞에 냅다 내던지면서 어머니가 하신 푸념이었다. 그 푸념 끝에 철퍼덕 주저앉느라 삐거덕거리는 마룻장 소리가 들렸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살이었다. 화살은 과녁이 되어버린 내 가슴을 향해 바람소리를 가르며 집요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 집에는 아아들이 여섯이나 되는데 그거를 다 우예 부조하노. 그라고 그 집 딸내미 둘이가 벌써 시집을 안 갔나. 그때 부조를 다 했는데 또 와 할라카노 말이다. 생각해 바라.  느그는 아아가 둘밖에 더 있나. 니는 그것도 모리고 등신같이 여섯 분(번)이나 부조를 할끼 아이가? 잘 한다. 돈 많거든 살림 한 분 아물따나 그래 잘 살어 바라.”

사정없이 이맛살이 구겨진다. 지난해 겨울까지는 종종 있어 왔던 일이었으나 그때마다 잔소리를 바가지로 얻어먹고 다시는 동네사람들 결혼 부조봉투 심부름(?)을 부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 그만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이 실수는 앞으로 한 열흘쯤 나를 괴롭힐 것이다. 철저하게 ‘품앗이’가 되어버린 저 세대의 경조사에 대한 고정관념과 맞장을 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쉰 살이 훨씬 지난 나는 이럴 때마다 철없이 화가 치민다.

“저 우에 어호댁 아들은 청첩장 받으믄, 그 집에서 저번에 부조를 얼매나 했는동 들바드(들여다) 보고 꼭 했는만쿰 한다카던데, 니는 짬대가리도 모리고 아물따나 해대는 거 보이 내가 잔주꼬(점잖게) 뒷집 늙이가 될라 카다가도 입을 안 띨 수가 없다.

마룻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어머니 엉덩이는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지 알 수 없다.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혈압도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한다. 더러운 성질은 언제 임계점까지 치달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서천으로 들으려고 하지만 소리는 집요하다.

“나는 주미(주머니)에 돈이 들오면 쇠 딸듯(닳듯)이 애끼고 사니라꼬 가시나들 한테 원망도 술타(숱하게) 얻어묵고 이날 이때까지 살어온 인간이라 느그가 돈 씨는 거 보믄 가슴이 다 오구라지고 없다. 니, 내 말 듣고 있나? 세현이 할배는 돈이라믄 내보다 동띠게(엄청나게) 무습었던 영감쟁이였는데, 가시나들이 즈그 아부지가 밸라다고…….”

나는 텔레비전 소리를 최대한으로 높여 방안이 마구 울리도록 만들었지만 어머니 푸념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작동을 해놓고 나가버린 녹음기처럼 어머니의 입은 주변 환경이야 어찌 되었든 말든 끊임없이 주절주절 푸념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아따, 이 봄밤에 누가 웬 노고지리통을 갖다 놨나, 이 시간에 와 이래 시끄럽은기요!”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움찔했다가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담배를 꺼내 물고 밖으로 나가려다 부지불식간에 불쑥 튀어나온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마루문을 여는 등 뒤로 톤이 훨씬 낮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는 니가 내 속으로 안 나왔다고 그래 마음대로 주께(지껄이다)지마는 나는 느그 잘 살어라고 한 소리다. 느그는 아이 이 늙이 맴을 몰릴끼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