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에 내리는 눈발 속에서

  • 입력 2010.03.15 13:07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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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헌이 능금밭에 전정을 하러 가려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커피 한잔까지 느긋하게 마시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마루문을 여는데 느닷없이 눈보라가 얼굴을 마구 때렸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서서 외등을 켜고 밖을 내다보니 엄청난 눈보라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마루 앞에 벗어놓은 신발마다 밤새도록 눈이 쌓여 소복했습니다. 허리춤에 꿰찬 전정가위를 풀어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또 하루 일이 늦어진다는 사실에 아침부터 마음은 무거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룻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눈을 털어낸 신발들을 들여 놓았지만 그 속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다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보니 온 나라가 눈 때문에 난리법석입니다. 바깥 풍경을 알리가 없는 집사람이 차려온 밥을 물리치지 못하고 모래알 씹듯 씹는 일도 이른 아침에 겪어야 하는 고통치고는 너무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게 밥상머리에서 깨작거리고 있는데 밖에 나갔다가 온 집사람이 하얗게 눈을 흘기는 모양을 보면서 슬그머니 숟가락을 놓아버렸습니다.

3월에 느닷없는 대설경보가 내려지고 남쪽 영천에도 눈발이 퍼부어 우리 집 막내 놈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오늘이 증조부 기일인데도 제삿장을 보러가지 못한 채 발이 묶여버렸습니다. 마루문을 열고 내다보니 멀리 국도에는 어쩌다가 트럭이 한 대씩 자벌레가 기어가듯 가고 있을 뿐 사위는 흩날리는 눈발 아래 적막하기만 합니다.

밖으로 나가보니 땅 위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 있고 다시 그 위에 더 많은 눈발이 내려 쌓이며 세상 풍경을 은은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을 꽁꽁 묶어버린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곳이 농촌이 아니라 도시일수록 인간들의 나약함은 한층 더 심하다는 것을 뉴스를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복숭아밭이 끝나는 곳에서는 눈발 속에서도 사방이 확 트이는 곳이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팔공산과 화산, 보현산이며 운주산 채약산의 주봉들이 눈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오래 그 산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해방공간을 떠올렸고, 빨치산을 생각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며칠 전에 다시 읽기를 마친『태백산맥』과 또 막 시작한 이병주의『지리산』탓일 것입니다.

눈 내리는 산, 눈 덮인 산들을 바라보면 그 최악의 조건을 견디어야했던 빨치산들의 악전고투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그러나 전혀 잡히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기가 일쑤입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선명해지는 눈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능선을 버리고 계곡을 타야하는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제 발가락이 마치 동상에라도 걸린 듯 가려워지기도 합니다. 짚신발로 또는 맨발로 수많은 비밀통로가 난마처럼 얽혀 있는 저 눈 덮인 산을 타야했던 빨치산의 동상으로 썩어문드러진 발가락이 커다랗게 눈가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파리를 다 떨어뜨리고 천둥벌거숭이가 되어버린 겨울 산에서 빨치산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연조건의 열악성 때문이었겠지요.

요즘 들어 다시 그 대하소설『태백산맥』과『지리산』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시 때문이었습니다. 전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1946년 10월 ‘농민항쟁’에서 가장 격렬한 곳이었던 ‘영천’을 시집 한 권 분량 정도의 장시로 쓰지 않고는 도저히 다른 작업은 할 수 없는 압박감 때문에 6개월째 그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공간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에는 이곳의 증언보다는 오히려 그 두 문학작품이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은 판단 때문이었지요. 그들이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최초의 시대적 배경은 흔히 말하는 ‘이념’이 아니라 ‘쌀’이었다는 사실은 요즘 내게 크나큰 화두입니다.

씁쓸한 영천에도 봄은 오고 있습니다. 보현산 하 짚은기미 사는 고라니 눈빛에도 생기가 도는, 세상의 악다구니에 귀를 닫고 기룡산 야생초 같은 시 몇 편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이 봄이 저물기 전에 눈에 핏발을 세운 사람들이 아집을 벗어던지고 팔공산 하 깊은 계곡 물소리 같은 시집 한 권 읽으며 그리운 나라를 꿈꾸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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