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⑦

오래된 미래, 인간발전소

  • 입력 2007.10.15 11:30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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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참 오랜만에 형님께 쓰는 편지입니다. 농민회 회장을 그만 두던 그해 12월, 배낭 하나 달랑 둘러매고 남해안을 돌아다니며 보낸 엽서 이후 오늘이 처음이군요.

저는 올해 농사를 벌써 마쳤습니다. 재작년에 심은 복숭아밭에 간작을 한 콩이며 들깨가 아직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깟 것이야 일이라고 할 수야 없지요. 지금쯤 한 해 농사 계산서도 뽑아보아야 하는데 올해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아직은 복숭아 판 돈이 많이 덜 들어오기도 했구요.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마지막 포도 수확으로 바쁘고 들녘에는 황금 이삭들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해 농사를 다 마쳤다는 생각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밀린 원고를 정리하다가 내던져버리고, 오래 전에 사다 놓은 책을 읽다가 덮어버리고, ‘백신애 전집’ 만드는 일을 해 보다가를 반복하다가 문득 ‘전원’을 꺼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돈키호테처럼 나의 전원을 꺼버렸지요.

일주일을 내리 마을 앞 금호강 북천에서 살았습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기다리면 가을 붕어 씨알이 썩 좋습니다. 가끔은 꺽지도 찾아오고 표준어로는 알 수 없지만 영천말로 부르는 ‘텅갈래’까지 찾아옵니다.

엇보다 피라미가 별로 달려들지 않아 낚시는 퍽 즐겁습니다. 그러나 낚시란 것이 한번 입질을 하기 시작하면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또 입질이 없을라치면 두세 시간은 찌가 꼼짝을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심심해서 물속의 붕어에게 ‘붕 선생’ 같이 좀 놀아봅시다, 하고 흰소리를 한 마디씩 하고는 했습니다.

‘붕 선생’도 ‘꺽 선생’도 ‘피 선생’까지 다 단풍놀이라도 가고 없는 것 같은 적막한 시간을 저는 전원을 꺼버린 돌덩어리처럼 앉아 있다가 올해 우리나라 쌀 생산량이 많이 줄었다는 신문기사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전원을 끈 것이 아니라 켜 놓고 있었던 셈이지요.

형님, 농사꾼들이 ‘흉년걱정’에서 벗어나 ‘풍년걱정’을 하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농사 풍년걱정이 흉년걱정보다 심각한 현실은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합니까?

땅, 농토야말로 ‘오래된 미래’입니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 전부터 땅을 일궈 거기다 쌀을 생산해 먹었습니다. 저 먼 시원의 부족국가 비바람 눈보라를 다스려 이 땅에 정착시킨 ‘쌀’이야말로 ‘민족 혼’이라는 것은 일찍이 전농이 대국민 선전 문구로 사용했던 말 아닙니까.

쌀은 ‘인간발전소’입니다. 도시에 살든 농촌에 살든 사람이면 밀가루나 고기로 배를 채워서는 힘을 못 씁니다. 사람은 쌀로 배를 채우지 못하면 전원이 꺼집니다. 전원이 꺼진 사람은 노동력을 상실했다는 것, 폐기처분 해야지요. 그런데 대통령을 필두로 우리 정부의 모든 부처에는 전원이 꺼진 사람들로 득시글거립니다.

전원이 꺼져 공동묘지에 가 묻혀야 할 사람들이 입안하고 시행하는 정책이니 농사꾼들은 가당찮게도 풍년걱정으로 날밤을 새웁니다. 오래된 미래이며 인간발전소인 쌀을 가지고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걱정입니다.
‘흰머리 소년’ 형님, 금호강 북천 물빛이 소주처럼 맑고 차갑습니다. 산처럼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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