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기억의 저쪽

  • 입력 2010.02.16 09:36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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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두운 기억의 저쪽은 사실 캄캄해. 그 당시 인민위원회 간부나 농민회 지도자가 살아서 돌아와 말하지 않는 한 10월 사건은 누구도 안다고 할 수 없어요. 나는 그때 열일곱이었는데, 내 눈으로 본 것밖에는 말을 못해. 한 사람 건너서 듣는 말은 구부러져 있다구. 기억이 흐릿해도 또 구부러지지. 그래서 나는 내가 본 것만 말을 해주지.”

여든이 넘은 어르신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또랑또랑하다. 나는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어르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어르신은 눈을 내리감은 채 느릿느릿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어르신 주변에는 영천의 우파(?)들이 주욱 도열해 앉아 있고.

“문제는 쌀이었어. 쌀을 줄 테니까 경찰서 정문으로 오라고 선전을 하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안 모이겠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들었지. 그런데, 줄 쌀이 어딨어? 그래서 난리가 나버린 거야. 지도부는 그렇게 사람들을 이용했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치뜬다.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쌀을 준다고 거짓선전을 해서 사람들을 모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구부러진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내가 읽은 자료와 들은 상식으로는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혓바닥을 지그시 깨물며 독사대가리처럼 쳐드는 질문을 눌러버린다.

나는 철저하게 듣는 일에만 복무해야 할 입장에 있다. 혹시라도 한 마디의 질문이 눈살을 찌푸리게 해서 입을 닫아버리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는 며칠 전에, 우연히 우파 선배들을 만난 김에 ‘10월사건’(이런 경우에는 우파 앞에서 ‘항쟁’이란 말은 쓰지 않을 만큼 처신을 잘 해야 한다)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는데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나의 하소연 끝에 그들의 배려로 마련된 자리였다. 애써 어르신에게 연락을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우르르 몰려나와서 멍석을 깔아 주었으니 나로선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웃기는 소리! 혹시 내가 못 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총을 들지 않았어.”
10월사건 주동자들이 총으로 무장을 하지 않았느냐는 내 질문에 어르신은 단호했다.

“농기구하고 몽둥이밖에 없었어. 그날 식전이었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는 거라. 그래서 나도 따라가 봤지. 가보니 경찰서장 관사 앞 수챗구멍에 군수가 발가벗긴 채로 죽어 있더라구. 왜 발가벗겼는지 그거야 나도 모르는 일이지.”

“사람들이 군수를 왜 죽였는데요?”
“인민위원회 상부에서 영천군수 이태수는 반드시 처단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던데.”
내 옆자리의 한 선배가 질문을 했고 건너편 자리에 앉은 다른 선배가 그 말을 받았다.
“천황에게 비행기 한 대를 헌납했다는 지주 000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어디 000만 그랬나. 영천도 비행기를 헌납했어.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할까. 영천에서 군민들 성금을 모아 비행기를 샀고 그 비행기 이름을 한문으로 썼는데 빙천호야, 빙천호.”
“빙천이 무슨 뜻입니까?”

“허허허, 한문 길 영(永) 자를 얼음 빙(氷) 자로 잘못 쓴 거지. 이거는 내 눈으로 똑똑하게 봤다구. 실물은 못 봤어도 사진을 찍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빙천호더라구.”
“000은 대단한 악질이었다는데 호화저택만 불타버리고 살아남은 게 이상하네요?”

나를 대신하여 오늘 자리를 주선한 선배가 질문을 해주었다.
“그때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게 더 욕된 일이었지. 뒷날 누군지는 몰라도 000 무덤을 파헤쳐 목을 끊어 가버렸고 하더라구. 그게 바로 부관참시 아니야? 어휴, 얼마나 끔찍해.”

나는 메모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사방연속무늬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그 속으로 끝없이 투망질을 하고 있는 착잡한 심정도 회오리치고 있었다. 죽은 자에 대한 응징에는 한의 깊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결단은 얼마나 담금질을 해야 그처럼 단호해졌을까. 그런 결행을 하기까지의 고뇌는 또 얼마나 깊고 넓었을까.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마음은 너무 무거웠다. 나는 밖으로 나가 콧구멍이 알알해질 때까지 길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서산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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