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제주도 동북쪽에 위치한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는 마을의 옛 모습이 잘 보전돼 있다. 하지만 이곳도 하나둘 높은 건물이 들어서며 개발의 풍파가 밀려들고 있다. 이에 마을주민들은 마을여행을 중심으로 사라지고 있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 환경, 농업의 가치를 알려내고 있다. 부석희 구좌읍농민회 부회장은 지난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마을발전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이런 노력의 중심에 섰다. 지난 1일 그를 만나 평대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확인했다.- 옛 모습이 잘 보전돼 있다.평대리의 평대가 평평하고 넓
[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제주 평대리 올레길은 아직 그 흔한 지도하나 없다. 하지만 평대리를 찾는 여행객의 발길은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다. 돌담과 올레길 등 옛 마을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는 데다 마을 주민들의 얘기가 더해진 까닭에 시간이 지날수록 주목을 받고 있어서다. 실제로 평대리 마을여행을 주도해온 부석희 구좌읍농민회 부회장은 마을여행 성공사례로 강연을 다닐 정도다.지난 1일 나선 평대리 올레길 탐방은 동뜨락협동조합이 준비 중인 ‘당근과 깻잎’ 카페에서 시작했다. 카페로 연결된 밭으로 나가니 당근꽃이 환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지난 1일 찾은 평대리의 한 켠에선 오는 6월 중순 문을 열 카페 ‘당근과 깻잎’의 막바지 실내 공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평대리 등 구좌읍 주민들의 주도로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이곳은 단순한 카페가 아닌 ‘동뜨락협동조합’의 본거지가 될 예정이다.“저희가 이걸 한 이유는 딱 2가지인데, 첫째는 지역농산물 홍보에요. 제주 당근 좋은데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농가들은 한 번에 수확해서 모두 공판장으로 넘기니 체험도 뭣도 없죠.”대표를 맡고 있는 유도균씨는 옆마을 송당리에 귀농해 유기농 당근농사를 지은 지
제주 농부의 한 해 농사 끝과 시작은 2월의 마지막에 몰려 있다. 한여름 50일 가뭄에 두세 번 파종했던 당근이 몸을 살찌우지 못한 채로 듬성듬성 남아 있지만 봄을 느꼈는지 잔뿌리가 수염처럼 나기 시작했다. 이젠 어쩔 수 없이라도 뽑아내야 한다. 겨울을 지낸 가을감자도 다시 싹이 나기 시작하니 한 해 감자 수확도 못한 처지에 가을에 심을 종자부터 심어놔야 하는 농부들은 이래저래 머리가 깨진다. 마음고생 돈고생이 어찌 올 한 해 뿐이었겠나. 그래도 농사지어서 먹고 살고 있지 않았던가.친구가 며칠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며 꼭 같이
사람들은 자기가 별거 없는 곳에 살고 있다고 입버릇으로 늘 말하고 나도 그런 줄 알고 살았다. 물때가 되면 고무옷을 챙기고 나서는 바닷일. 힘들다고만 하다는 밭일로 늘 바쁘게 살았으니 그저 바다를 건너 섬을 떠나야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자식들을 내몰았던 제주섬이다.우리 할아버지는 뱃속에 아버지를 남기고 쫓기듯 일본으로 도망을 가고 아버지가 마흔 일곱 되던 해에 겨우 찾아 우리에게 할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 볼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도 군대 간다는 핑계로 한참 육지에서 떠돌다가 아프다는 할머니 엄살에 못 이겨 하나밖에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졸업 여행이라며 우리 동네를 찾았다. 경상북도 상주 백원초 - 상주도 촌이니까 나하고 잘 맞겠구나, 삼촌 말 잘 듣게 겁을 주려는데 웬걸, 얼굴 보는 첫 자리부터 꼬인다. “왜 할아버지는 수염도 안 깎고 시커매요”라고 시비부터 건다. 알고 보니 시내 가까운 학교에서 온 아이들이란다.농부와 조무래기들과의 마을투어는 잘 됐을까? 타고 온 버스는 빈터에 세워두고 기사분한테는 서너시간 푹 쉬시라고 말해 놓고 아이들과 마을로 들어선다. 아무데나 높은 돌담이 보이면 기어오르고 뛰어 내리는 아이, 농사용 트럭이 보이자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밭담에 관해 문헌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234년 제주판관 김구가 농지와 관련한 재산권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경계용 밭담을 쌓도록 지시했다고 적혀 있다. 즉 고려 후기를 즈음해 밭담이 확산됐다는 사실과 더불어 당시의 쓰임새 하나를 확인할 수 있지만, 최초로 언제부터 그리고 어떤 용도를 위해 밭담을 쌓게 됐는지에 대해선 사료가 부족해 알 길이 없다.다만 화산섬 제주도의 척박한 토양환경을 생각하면 아마도 밭 주변에 돌을 쌓는 행위는 설령 그로부터 기능성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옛날부터 있었고, 어디에나 있다. 그 흔하고 무던한 밭담들이 제주의 풍경을 특별하게 만든다.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소중해진 밭담의 가치를 제주는 연신 홍보하며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흔한 탓인지, 정작 소중한 밭담을 ‘보존해야 한다’는 절박함은 눈에 띄지 않는다.2014년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이후 제주도는 본격적으로 밭담 관광산업화에 착수했다. 현재 제주엔 총 6개소의 밭담길이 조성돼 있고 올해로 4회째 밭담축제가 열렸으며 밭담과 연계한 식품·캐릭터·생활용품 개발 등 6차산업화도 탄력을 받고 있
사는 것이 견뎌내는 일임은 오랜 더위와 한 번 지나간 태풍만으로도 알게 된다. 7월 중순부터 씨를 뿌리고 8월이 되면 잔디 싹처럼 땅을 뚫고 서는 당근 싹이 보이지 않았다.“우리 밭에 와서 한 번 봐주라.”비가 오기만 하면 싹이 나련지 늦은 파종이라도 해야 할 건지 나에게도 너무 어려운 문제를 낸다. 30년 넘게 당근 농사를 했다지만 판사처럼 결정을 내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촉촉한 땅에 씨를 뿌린 밭, 검은 흙밭, 모래땅, 바짝 마른 땅 모두가 발아조건이 다르고 씨가 움틀 수 있는지, 아예 씨가 죽어버렸는지, 움트고 나서
아무리 그곳이 좋다 해도 살던 터를 버리고 새 삶을 찾아 떠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물을 건너가는 건 더 많은 것들을 남겨둬야 해서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꿈으로만 끝낼 바람이었을 것이다.서울쥐 - 육지에서 온 몽생이들3년 사이에 나는 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아졌다. 우리 동네에 온 친구들, 이주민이라는 말이 싫어서 ‘새로운 동네 사람’이라 하자고, 이주민 꼬리표를 달고 언제까지 살 거냐고 우겨보는 것은, 눈여겨 본 친구들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빈 집 구해주세요”, “이 동네 살 땅 좀”. 우리 동네가 괜히 마음에
10여년 전 겨울에 우리 식구들은 금강산으로 가는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북한은 더 추울 건데 얼어 죽을 일 있냐”는 아내와, 엄마 편에 서서 “아빠만 가” 하고 짜증내는 중학생과 6학년 두 딸에게 “이번에 같이 안가면 앞으론 나하고 어디 가자고 절대 하지 마”라고 큰소리를 친 건지 빈 건지 그렇게 금강산 나들이는 시작되었다. “다음에 따뜻한 날 가지 뭐” 했다면 지금까지 노래로만 부를 ‘그리운 금강산’이었을 것이다.우리가 찾은 금강산은 “이야~”라고밖에 할 말이 없을 듯 숨 막히는 풍광을 보여준다. 물빛은 왜 그리 고운 건지, 햇
선봄이 오려나, 느닷없이 큰 비가 오고 태풍처럼 센 바람이 한라산의 깊은 눈마저 녹이더니 겨울의 티끌들을 모두 날려 버렸다.제주도의 봄은 그렇게 시작하려나 보다.술 한 잔 하자하면 나는 꼭 제주 막걸리를 먹는다. 그 하얀 막걸리 병에 ‘제주 4.3 70주년’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아니 술병에 4.3이라니. 싸우다 죽거나, 억울하게 죽거나, 뭣도 모르고 죽어간 영혼에게, 숨죽여 살던 제주 사람들에게 술로라도 퍼서 속이라도 달래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움이 더 크다. 70년의 겨울이 지나서 술병에도 쓰여진 4.3과, 막걸리를 먹는 나를 본다.내 할머니는 식구들을 지키려고 매일 밤 집을 버리고 모래동산을 파고 들어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단다. 매일 그렇게 지켜 낸 목숨이란다.할아버지
며칠 쌓인 깊은 눈 속을 어찌 살꼬 하던 차에 바닷바람을 타고 해가 어렵게 얼굴을 내밀었다.살아갈 날들이 뭐 그리 어렵겠냐. 가끔씩 들려오는 희망으로 오늘 씩씩해지면 살아볼 만 하지 않던가. 설 수 있으면 힘내서 일어나 보는 것이다.좀처럼 풀리지 않는 듯한 일들을 마무리하고 한시름 놓기도 전에 할 일은 다시 생겼다. 2018년의 시작은 늘 그래왔듯이 이런 저런 대장을 뽑는 일로 머리를 아프게 한다. 누구나 잘해보겠다고, 좋은 세상 만들 거라고 힘줘 말은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버릇대로 나쁜 이미지만 남겨놨으니 사람들은 “누가 해도 그 모양 그 꼴”이라고 마음을 닫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럴지언정 사람 하나 잘못 세워서 몇 년을 욕하고 궂은 꼴을 보게 되는 것은 누굴 탓할 것이 아니라 나를 탓
겨울이 딱 하루 만에 오는 것처럼 갑자기 추워지더니 벌써 한 해 끝자락이 오고 말았다. 올해도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로 해가 가는 것을 느끼기는커녕 못난 자신을 탓하며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몸집이 큰 어느 형님은 겨우 5km를 뛰고 나서 자랑 자랑 하더니 10km를 뛰고 나선 “마라톤은 나를 추월하는 일”이라며 혼자 많이도 좋아한다. “그게 뛴 겁니까, 걸은 거지”라고 우기고 싶은데 그 몸에 달리기는 너무 힘들다는 걸 알기에 잘 했다고 손뼉이나 쳐줄 수밖에 없다.제주도청 맞은편 인도엔 아직도 천막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먹지 않고 마흔 두 날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김경배라는 오십 청년은 죽지 않고 병원에 실려 갔다. 자기 마을에 신공항이, 아니 제주에 제2공항이 들어서는 걸 막기 위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가을이 깊어 가는 것을 알리고, 밭에 콩들은 잎을 날려 보내고, 해가 날 때 거둬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두 번 뿌리고서야 싹을 틔운 당근이며 무는 한 겨울이 와도 버틸 만큼 푸른 잎들과 뿌리를 키워냈다. 궂은 날씨와 벌레들과 싸워서 어렵게 이겨낸 잘된 농사이다. 풍년이면 다가오는 겨울, 제값 받기는 틀렸다는 것을 모두 알지만 잘 자라주는 놈들이 고마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농부들의 마음이리라.몇 년의 기다림이었던가. 마음고생하며 키워낸 아이들의 손에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플릇이 들려지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마음 졸이게 되는 연주가 시작됐다. 제주의 가을밤이 뜨거워지는 것은 목청껏 부르는 노랫소리, 오케스트라 연주, 보는 이의 손뼉소리와 함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자리를 있게
살다살다 올 여름만큼 오랜 더위는 처음이었다. 작은 모래사장엔 놀러온 피서객들로 꽉 차 있고 농사용 차, 트랙터가 늘 다니는 마을길엔 그들이 타고 온 차들로 어지럽다. 다들 조심한다고는 하는데 짜증이 나는 건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밭에서 일을 끝내고 땀에 절은 몸을 바닷물에 담는 것을 나는 ‘바닷물 소독’한다고 한다. 몸에 묻은 흙이며 풀에 긁힌 가려움, 농기계에 까진 손이며 다리까지 한꺼번에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새하얀 모래 위에 바닷물이 있고 그 위에 떠 있는 나, 밭에서 죽을 둥 살 둥 일을 했던 건 다 잊고 “아이고 좋다” 할 뿐이었는데, 하얀 살들 속에 흙때 묻은 얼굴로 섞이는 게 싫은 것과 자꾸 누군가에게 내몰려진다는 것으로 나에게 그런 여름 바다는 이제 없을 듯하다.
[부석희(제주시 구좌읍)]회의 중 뒷골에 찡한 아픔이 머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오늘은 조바심으로 머리 끝이 터지려고 한다.정성껏 마음을 맞추려고 여러 차례 말을 나눈 동네 형님들도 일을 뒤죽박죽 몰고 간다.200가구쯤 되는 동네에 협동조합을 만드는 자리다.창고로 쓰이던 40년 된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서 ‘샵’을 만들고 협동조합은 일을 잘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여 있다.한 두 차례가 아니다. 이미 열 번 넘는 교육, 수차례 견학으로 농사짓고 물질 밖에 모를 줄 알았던 어머니들까지도 협동조합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사회적 협동조합은 또 어떤 일을 하는 건지도 내가 알아가는 만큼 자기 생각들을 말할 정도가 됐다. 그래서 오늘은 회의가
[부석희(제주시 구좌읍)]고기가 많이 잡힌 날은 먼 바다에서 부터 아득한 고동소리가 들리고 동네 사람들은 손에 담을거리들을 들고 선창가로 모여들었다. 돛단배는 풍선배, 엔진이 있는 배는 통통배, 멀리서 점들이 보이기만 해도 “저기 석희 족은 하르방네 풍선배가 일등으로 왐쩌”.일찍 고동분거 보난 괴기 하영 잡은 거 닮다. 윗동네, 옆동네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들 입맛 다시며 한 소리씩 해대니 선창가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나의 놀이터는 늘 바다여서 고동소리가 들리든 말든 맨 앞줄을 차지했다. 이런 풍경이야 바닷가 마을에 살았으면 누구에게나 그려지는 그림이다.우리 마을에는 무슨 재미난 얘기거리가 없었나… 세월이 지나버려서 옳게 담아두지 못해서 잊혀져 버리는 일은 없었을까?
[부석희(제주시 구좌읍)]나에게 찾아와 마을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꼭 들러보는 곳이 있다. 넓적바위 하나를 차지해서 팬티만 입고 누워 있어도 지나는 사람 없어 부끄럽지 않던 바닷가는, 해안도로가 생기고 렌터카가 주인행세를 한다.아무 때나 훌렁 벗고 바닷물에 뛰어들기 좋아하는 나는 이제 몰상식한 사람이 돼 버렸다. 그래서 풍광 좋은 바닷가는 미뤄두고 마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 머릿속에 있는 지도를 꺼내서 가다보면 올망졸망한 돌담길, 흙길, 모랫길도 밟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길 끝집에 ‘혹하르방’이 살았었다. 초가는 내려앉아 있는데 높은 돌담과 올레어귀에 버티고 선 오래된 팽나무는 우리에게 선뜻 마당을 내주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이리라. 집을 나선 ‘혹하르방’은
[부석희(제주시 구좌읍)]1948년 4월 3일, 제주 4.3은 오름마다 붉은 봉화가 타오르면서 항쟁의 시작을 알렸다.1947년 3.1절 기념행사가 관덕정 부근에서 열릴 당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말굽에 채였고 그냥 가버리는 것에 화가 난 시위대가 거세게 항의를 하던 도중에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그리고 현장에서 6명이 숨을 거두게 된다.미군정과 경찰은 시위대 주동자와 학생들을 마구 잡아들였고, 화난 제주 민심은 제주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경찰 까지도 전도적인 총파업에 참여하는 데 이르렀다. 그해 3월 10일은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지 못하는 제주도민 총파업으로 민관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날이다. 제주에서 스무번째로 모아지는 촛불은 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