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는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는 것 혹은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본의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는 전 세계에 대한 테러 행위이고 그 피해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특히 반감기(방사선 물질의 양이 처음의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를 고려하면 우리 세대만 피해를 보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수만 세대가 흘러도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것은 인류가 망하고 나서도 존재할 만큼 위력적이다.우리 정부는 올해 봄과 여름 사이 일본이 핵오염수를 방류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제주도에서는
올해는 하얀 쥐의 해라 합니다. 원래 쥐라는 동물이 호감형은 아니지만 나라를 국밥처럼 말아드신 전직 대통령 덕에 이미지를 한층 망쳐버린 것 같습니다. 해마다 설날 즈음엔 온갖 방송에서 ‘소의 우직함’이니 ‘영리한 토끼’니 하면서 새해의 덕담으로 호들갑을 떨기 마련인데 올해는 좀 덜한 듯합니다.쥐는 부지런한 동물입니다. 영리해서 자연의 위험을 미리 인지하기도 합니다. 음식을 모아두기도 잘 하고 가족끼리 나눠먹기도 잘합니다. 생존력이 강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열심히 노동(?)을 합니다. 이러한 특성들이 인간의 소망과 만나 십이간지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1945년 8월 10일, 일제는 미국에 항복 의사를 전달한다. 미국은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고 일본의 항복 조건이 담긴 ‘일반명령 1호’가 작성되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 중에는 한반도를 비롯한 극동지역에 관계된 부분이 있었다. 갑작스런 소련의 참전과 이미 두만강을 건넌 상태에서 이 급박한 임무는 한반도라는 곳을 들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한 순간에 무려 17만5,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두 개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된 8월 8일 소련은 참전을 선언하고 곧바로 남하를 시작한다. 이틀 후인 10일에 일제가 버티지 못하고 항복의사를 표하자 한반도도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일왕이 항복을 선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한반도가 둘로 갈라진 지 70년이 넘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직접적인 원인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승전국으로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온,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의 힘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극이 계속된 것이다. 이 분단의 비극은 이미 일제강점기 말엽에 그 씨앗을 잉태하고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우리는 10년 사이에 두 번의 전쟁을 겪은 민족이다. 수백만이 목숨을 잃은 한국전쟁과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그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이라는 태평양전쟁 중에 우리가 치른 고통은 실로 끔찍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광기에 사로잡힌 한 국가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식민지 시대 내내 약 80%의 민인이 농민이었다. 지주와 자작농을 뺀, 자작겸 소작농과 순수 소작농, 머슴이라 불리던 농업노동자의 숫자가 2,000만 민인 중 8할이었던 것이다. 결국 식민지 수탈로 인한 고통의 대부분을 농민들이 겪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3.1항쟁의 주역도 농민이었고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1920년대에 독립운동사 최대의 비극인 자유시참변이 일어났고 불과 10여년이 지나 다시 끔찍한 참극이 일어난다. 1933년 초부터 약 3년여에 걸쳐 항일투쟁에 나선 조선인 500여명이 학살당하고 수천 명이 체포, 고문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민생단 사건이라고 부른다. 애초에 민생단이라는 단체는 유령과도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일왕 히로히토는 식민지배 시기 세 번에 걸쳐 암살 시도를 당한다. 첫 번째는 아나키스트 부부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그의 결혼식에 맞추어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된 것이고, 두 번째가 이듬해인 1924년 의열단원 김지섭 열사가 일왕궁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두 사건이 실상 일왕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과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일제는 1938년에 ‘간도특설대’라는 부대를 창설한다. 괴뢰국인 만주군에 속한 부대로 부대원의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의 목적은 만주 지역의 독립군, 특히 일제를 곤경에 빠뜨렸던 항일연군의 소탕이었다. 조선의 독립군은 조선인이 없앤다는 기치 아래 많은 친일군인들이 이 부대에서 활약했다. 소위 한국전쟁의 영
1937년 4월 30일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는 호외를 발행한다. 한 인물의 검거 소식을 대서특필한 것인데 기사 제목은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였다. 한 사람의 체포를 조선공산당의 궤멸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은 이재유였다. 사회주의 운동에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던 30년대에 맹활약한 이재유를 빼놓고는 해방투쟁사의 커다란 구멍을 메울 길이 없다. 이재유는 누구였던가.1905년 함경북도 삼수에서 화전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재유는 고학을 위해 상경했다가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하고
1920년대 중반에 민족해방세력은 수많은 파벌로 갈라져 분열을 거듭했다. 크게 나누어서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였지만 그 안에서도 타협주의와 비타협주의, 통합파와 비통합파 등으로 분열되었고 크고 작은 단체들은 350여 개를 헤아렸다. 그 와중에 상해 임정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외교중심론으로 인해 분열되면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일차적으로는 베이징에서 안창호, 원세훈 등이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으나 그 배경은 훨씬 복잡했다. 우선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자치를 내
독립투사들이 운명처럼 갈 수밖에 없던 곳이 식민지의 형무소였다. 이전의 조선은 실질적으로 감옥이 없는 나라였다. 죄를 지은 자들은 태형이나 노역형, 유배형에 처했을 뿐 감옥에 가두어 두는 징역형은 없었다. 사극에서 흔히 보는 감옥 장면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를 임시로 가두는 곳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근대적인 징역형이 생기고 장기간 감옥에 갇혀 형벌을 받는 체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 낯선 감옥 풍경은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끔찍한 공간이었다. 일제는 전국에 총독부가 관할하는 22개의 형무소를 운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마친 1918년 무렵 우리나라 총 경지면적은 500만 정보에 육박하였다. 불과 8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늘어난 농지가 농민들의 생활 향상으로 이어졌을까? 그렇지 않았다. 같은 기간 지주는 두 배로 늘어났고 특히 일본인 지주 9만명이 전체 토지의 37%를 소유하고 소작료를 받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전 민인의 80%가 농민이었으므로 농민들의 고통은 곧 모든 이의 고통이었다.새롭게 지주가 된 일본인들과 일제에 빌붙은 자들, 예를 들어 서울의 이완용, 공주의 김갑순, 광주의 현준호 등 지방마다
에밀졸라의 유명한 소설 ‘제르미날’은 19세기 말엽의 프랑스 광산노동자의 파업을 다루었다. 약 70여 일 동안 지속된 당시 광부들의 파업은 세계 최장기 파업이었다. 그런데 그 기록이 식민지 시대 원산에서 깨진다. 위대한 사건들이 흔히 그렇듯이 처음에는 사소한 불씨 하나가 던져졌다. 중유를 정제하던 ‘일출(日出)’이라는 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고 노동조합은 이것을 민족적인 모욕이라고 분개하여 감독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회사가 요구를 거부하고 일단 회사 차원에서 파업이 시작된 게 1928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명사십리가 있는 곳이 지금 북한 땅인 원산이다. 이미 1920년대에 원산은 큰 도시였다. 원산은 동해안에서 유일한 무역항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천혜의 항구였다. 위에서 내려온 호도반도와 아래에서 올라간 갈마반도가 원산항을 둘러싸고 천연 방파제가 되어주었다. 그런 조건 때문에 1880년 최초로 외국에게 개방된 항구이기도 했다.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면서 인천과 원산을 우선적으로 원했다. 그 중에도 원산에 발을 딛기를 서둘러 인천보다도 2년이나 먼저 개항을 하였다.원산에는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 내에서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중에 김사국이 주도하던 서울청년회가 가장 큰 세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외국 유학을 하지 않은 국내파 세력이었다. 여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약수 등이 주도한 북풍회가 두 번째로 큰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외에도 사회주의 성향을 지닌 청년 단체는 전국적으로 수백 개를 헤아리고 있었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는 무려 250여 단체가 사회주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중앙집행위원만 600명에 이를 정도로 큰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도한이라는 단어는 1920년대에 무려 40만 명 이상이 종사하던 직업을 이르는 말이다. 짐승을 도살하는 자라는 뜻 그대로 흔히 백정이라고 부른다. 백정 계급에는 도한만 있는 게 아니고 버들가지로 광주리 등을 만드는 고리백정, 신발을 만들던 갖바치, 노를 젓던 수척, 숯을 굽던 산척 등 여러 직종이 있었다. 1884년 갑오개혁 때 이들은 형식적으로 신분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으나, 1920년대까지도 차별과 사회적 불이익은 여전하였다. 심지어 호적에 자신의 직업을 써넣어야 했으며 백정이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1920년대에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사회주의 그룹에는 남자들만 있던 게 아니었다. 아직 역사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많은 여성들이 사회주의운동사 첫머리에 있다. 그 중에도 트로이카라고 불린 이들이 있었으니 주세죽과 허정숙, 고명자였다. 공교롭게도 이 셋은 각기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이들은 실로 고난에 찬 삶을 살게 된다.소설가 심훈이 ‘대리석으로 깍은 것 같은 미모’였다고 표현한 주세죽은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져 세간의 관심을 더 받았는데 약관의 나이에 상해에서 만난 박헌영과 결혼
1900년에 태어난 동갑내기 세 젊은이가 있었다. 삼일 항쟁 때 갓 스무 살이었던 이들은 항쟁에 직접 참여하면서 완전히 인생이 변한다. 그들의 인생만 변한 게 아니고 1920년대 한국사회를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맹렬한 독립운동가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독립운동의 노선은 사회주의였다. 그 세 명의 이름은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다. 박헌영은 앞으로도 자주 등장할 이름이지만 다른 두 사람은 상대적으로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인물이다. 혜성처럼 서울에 나타나 독립운동의 전선을 새롭게 구축해낸 이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