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도 메마르던 날이, 지난주부터 내린 비로 온 대지가 촉촉해져 이제 좀 걱정을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고 말 것을,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온통 시름투성이였습니다. 온 산과 들이 체에 친 밀가루인 양 폴폴 날려서 뭐 하나라도 싹이 트고 자랄 수가 없었으니 애가 탔던 것입니다. 게다가 전에 없이 오래간 산불도 걱정을 보탰습니다. 길어도 사흘이면 끌 수 있었던 웬만한 대형 산불과 다르게 일주일이 더 걸렸으니, 장기산불도 이제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지 싶었던 것입니다.산다는 일이 온통 걱정하는 일이라고, 불완전한 세상에 불완전한 생명체
요새 학교에서 배부하여 아이들 등교 전에 검사하는 코로나 자가진단키트를 보면 임신 테스트기로 선명한 두 줄을 확인했을 때가 자연히 떠오른다. 뱃속에 새사람을 기다리던 차에 임신을 확인한 순간 엄마가 된다는 기쁨만큼이나 크게 느꼈던 것은 걱정과 불안이었다. 만일 농번기에 출산이 겹치면 경제적으로도 타격이 심할뿐더러 그야말로 산후조리 기간이 민폐로 느껴지고 과연 충분한 산후조리를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추수할 때쯤 몸을 풀겠다 싶으면 당장 씨앗 넣는 일을 멈추고 줄이는 등 농사 계획을 수정한다. 아마 대부분의
마당 한쪽에 심어놓았던 수선화가 싹을 내밀기 시작한 것으로 봐서 땅 속에서는 봄을 만드느라 분주한 모양이다. 나는 그들보다 먼저 서둘러서 대파 파종을 하고 밭에 퇴비를 뿌렸다. 밭 주변의 쓰레기들을 치우고 정리까지 했다. 밭에 뿌리던 퇴비를 남겨서 텃밭에 쓰려고 집으로 끌고 왔다. 퇴비를 뿌려서 손봐둘 자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봄에 심어야 할 푸성귀가 좀 많은가.집 뒤편의 20여 평쯤 되는 텃밭이 어느 순간부터 비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심어둔 도라지가 거슬렸다. 시어머니는 흡연을 하는 아들이 걱정되어 기관지
귀농 5년차, 나는 2022년 이번 해에 홍천군 영농 4-H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전에 다른 단체의 강원지부장을 맡기도 했었고, 워낙 이곳 저곳 단체 활동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마음가짐이 조금 다르다. 그건 내가 이 단체의 61대 첫 여성회장이기 때문이다.첫 여성회장이라는 타이틀은 나에게는 살짝 부담스럽지만 기분 좋게 설레는 책임감이기도 하다. 그동안 다른 단체에서 지부장 역할을 해야 해서 4-H 활동을 아주 열심히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회원들이 회장으로 지지해준 이유는 여성회원을 확대하겠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개
해는 부모와 같아서 맨날 봐도 좋고, 비는 형제와 같아 사흘만 봐도 지겹니라, 했던가요? 예전 옆집에 사시던 할머니께서 무심결에 던진 말씀입니다. 그 비유가 참 적절하게 느껴져서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 놓았다가 심심찮게 풀어 먹고는 합니다. 겨울가뭄이 하도 심해 지겨워도 좋으니 비가 흠뻑 내렸으면 하고 바람을 가져보는 요즘입니다. 또 있습니다. 아홉 번째 어머니라도 그 마음 씀이 형제보다 낫다고 어른들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언론에 드나드는 계부 계모들의 반인륜적 사례는 극히 일부이고, 실은 그 자리에 맞는 어른다움을 지키려고 노력하
긴 겨울방학에 이어 봄방학마저 끝나간다. 코로나로 아이들은 집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방학이 이렇게 지겨울 수가. 학부모로서 심신이 고갈되고 있다. “엄마, 저 좀 봐봐요”, “엄마, 이거 어떻게 해야 돼요?”, “엄마, 간식 뭐에요?”, “엄마, 엄마, 엄마!!” 내 눈·코·입은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나는 늘 집에서 아이들에 의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 스위치를 수시로 꺼야 한다.아이들 방학이 곧 엄마 개학이라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내 일을 기꺼이 미뤄두는 것이 엄마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오전 10시 넘도록 들에 나가지 않으면 영락없이 나미(2013년생 진돗개)가 나를 부른다. 콧바람을 쐬러 가자는 것이다. 낯선 사람이 왔다고 알리는 짖음과 나를 부르는 짖음이 다르다. 나미와 돌쇠(4살, 나미 아들)는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있는 현관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다니는 눈길이 심히 부담스럽다. 1시간의 짬을 내서 나미와 돌쇠를 트럭에 태우고 나가 들판에서 잠깐이나마 목줄 없이 뛰놀게 해줘야 비로소 맘이 편해진다.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개를 키우는 목적은 거의 영양보충을 위해서였다. 마당 한쪽에 돼지나
2017년 귀농을 결심하고 실천할 당시, 도시의 친구들은 내가 농촌에서 3개월 이상 버티면 성을 바꾸겠다고 장담하곤 했다. 도시는 물론, 해외까지 나가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내가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도 벅찰 것인데, 심지어 시골살이를 자처하는 것을 보고는 못 견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친구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어느덧 나의 귀농 생활은 5년이 넘어가고 있다.매년 여름 찰옥수수를 삶아서 팔기 위해 파라솔이나 천막을 치고 걷기를 반복하면서, 옥수수 장사 경쟁이 심한 동네에서 끊임없이 시비가 걸리는 탓에 작년 여름 정식으
일전에 지인들과 함께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인지라 굳이 소개를 안 해도 되었지만, 여럿이 모인 자리인 만큼 각자 가지고 있는 콩알만 한 직위라도 소개하며 공적인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KF94 비말 차단 마스크를 야무지게 쓰고서 말입니다. 하필 그날은 남편과 동행한 자리였는데, 진행자가 부부 중 한 명만 인사를 하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남편이 외부활동이 많은 내게 양보를 했기에, 마이크를 넘겨받고서는 분위기에 맞다 싶은 몇 마디로 인사를 채웠습니다. 짧은 인사 후 진행자에게
‘마스크!’ 아침마다 학교와 유치원으로 나서는 아이들에게 확인하는 말이다. 가방을 메고 가듯 마스크를 쓰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으며, 17개월 막내도 밖에 나갈 때면 마스크를 껴달라고 입과 귀 사이에 손을 댄다. 상상도 못했던 일상이다.셋째를 임신하고 나서 코로나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첫째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지만 입학식 없이 집에서 EBS 방송을 보며 1학기를 보낸 후, 2학기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교를 갔다. 하교 후에도 예전 같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어둑해질 때쯤 마지못해 집으로 왔을 텐데 지금은 거리두기가
얼마 전에,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여성농민들을 인터뷰하고 싶다며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농민의 ‘농’자 마저 거론하지 않는 매체들이 대부분인데 흙 속에 묻혀서 보이지도 않는 여성농민을 굳이 들춰보겠다는 의지가 실로 가상하기까지 했다.신문사 기자가 이쪽의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내가 통역사 노릇을 하느라 인터뷰 자리에 같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76세이고 논 500평, 밭 1,500평이 남편 명의로 되어 있다고.결혼 전, 그러니까 어렸을 때의 꿈이 무엇이었냐고 기자가 물었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라 눈 뜨면 끼니 해결이
농촌살이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농촌 창업은 도전해볼 만한 일, 혹은 생계를 위해서 한 번쯤은 고려해보는 일인 듯하다. 도시에서 알고 지내던 동생은 애견힐링센터를 하고 싶다고 문의를 하고, 친한 언니는 명상치유센터를 운영하면서 원예치유체험장과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고 한다. 또래 친구는 커피체험농장을 하며 비누 등을 만드는 공방 카페를 하고 싶단다.이들은 먼저 농촌에 정착한 내게 청년창업농 지원사업에 대해 묻고, 대출 금액과 방법 등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이들에게 왜 농업·농촌이냐고 되물었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앞으로 먹고살려면 지원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