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림축산식품부(장관 이동필)는 첨단유리온실사업에 이어 올해 식물공장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이에 식물공장과 첨단유리온실 둘 다 농민이 소외된 사업이란 비판이 거세다.기후변화와 농업침체를 해소할 대안으로 식물공장이 부각되고 있다. 지난 5월 국내 최대규모의 재배시설과 장비를 갖춘 식물공장이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 준공됐다. 오는 2016년 3월까지 총 227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될 이 식물공장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3,500개를 설치해 8단으로 3만 포기의 상추를 재배할 수 있다. 준공식엔 김재홍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과 김완주 전북지사가 참석해 식물공장에 관심을 보였다.현재 국내의 식물공장은 20여개 미만이다. 대부분이 영세한 규모에 채산성 확보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형편은 못 된다. 하지만 식물공장에 대한
“유리온실이라는 게 애초부터 경기 북부지역에는 맞지 않는 시설이었어요. 연료비를 감당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런데 당시 정권이 표를 의식하고 인기 끌려고 사람이 많은 경기도에 유리온실을 지원한 거예요.”1993년께 경기도 여주군에서 유리온실을 운영했었다는 권태국씨는 유리 대신 비닐이 둘러쳐진 온실을 가리키며 입을 뗐다.“연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유리온실 운영을 지속할 수 없었어요. 또 파손된 유리를 수리하고 싶어도 더 이상 같은 유리가 생산되지 않으니 도리 있나요.” 과거의 유리온실은 뼈대만 남긴 채 포도재배를 위한 비가림시설로 이용되고 있었다. 당시 이용된 유리는 4mm.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려면 같은 두께의 유리를 이용해야 하지만 현재 4mm 유리를 생산하는 유리공장
지난 2월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이동필)가 올해부터 식물공장 시범사업에 대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시범사업을 통해 식물공장의 기술력을 발전시키고, 경제성을 분석해 상용화에 대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식물공장은 땅에서 자라는 작물을 온도나 양분, 습도의 조절이 가능한 밀폐형 공장에 옮겨 생산하는 형태이다. 이미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식물공장을 통해 엽채류의 생산이나, 도시농업의 일환으로 식물공장을 활용하고 있다. 농민단체에서는 농업의 기본을 무시한 식물공장의 건설이나 농업을 산업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상용화 성적은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이미 3년 전부터 시도한 I사와 P사의 경우 영업을 중단했고 경남에 있는 식물공장은 소유주가 바뀐 채 가동되지 않고
지난 2월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이동필)가 올해부터 식물공장 시범사업에 대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시범사업을 통해 식물공장의 기술력을 발전시키고, 경제성을 분석해 상용화에 대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식물공장은 땅에서 자라는 작물을 온도나 양분, 습도의 조절이 가능한 밀폐형 공장에 옮겨 생산하는 형태이다. 이미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식물공장을 통해 엽채류의 생산이나, 도시농업의 일환으로 식물공장을 활용하고 있다. 농민단체에서는 농업의 기본을 무시한 식물공장의 건설이나 농업을 산업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상용화 성적은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이미 3년 전부터 시도한 I사와 P사의 경우 영업을 중단했고 경남에 있는 식물공장은 소유주가 바뀐 채 가동되지 않고 있다
2009년 또다시 고개를 든 첨단유리온실사업에 대해 찬성하는 전문가들도 물론 있었다. 그들은 “유리온실사업은 일종의 벤처”이므로 고투입, 고위험은 당연하며 “한정된 내수시장을 바라보고 농사짓는 시대는 끝났다. 위기에 직면한 한국농업의 활로를 위해 규모화를 통한 첨단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려의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1990년대 실패로 끝난 유리온실의 악몽이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규모 시설원예 단지는 원칙적으로 수출을 목표로 운영되는 것이 타당하지만, 정부가 조성하려는 유리온실 시설 설치에 앞서 수출관련 인프라가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국내 소규모 개별시설 농가에 미치는 영향까지 면밀히 분석하고, 시설 규모, 시설종류, 작물, 생산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며
1990년대 유리온실 육성정책 본격화 1990년대 정부는 우르과이라운드(UR) 등 본격적인 개방농정 시대를 맞아 농업분야의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른바 ‘농어촌구조개선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원예농업은 낙후된 시설을 현대화하고 규모화 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1991년. 정부는 ‘성장작목 종합시범단지조성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유리온실을 본격 도입했다. 이 사업은 보조 60%, 융자 40%로 농가의 자부담이 없었다. ‘시설채소시범단지조성사업’도 추진됐는데 보조 60%, 융자 30%, 자부담 10%로 농민들의 자부담을 일부 유도했다. 하지만 정부의 획일적인 하향식 사업 추진으로 현장상황과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보조금에 치중해 충분한 준비 없이 뛰어든 농민들이 빚더미에 오르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0년대 초 UR협상 타결로 WTO의 출범하면서 우리 농업은 본격적인 시장개방에 놓이게 된다. 시장개방시대 농업의 생존전략은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개선 이었다. 규모화 기계화 과학화라는 구호가 동원되며 우리 농업은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부터 맞춰진 시장 경쟁력 강화 농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이 시점에 최첨단 농업의 모델로 등장한 것이 유리온실사업이다. 비닐하우스도 흔치 않던 시절 최첨단 장비가 갖추어진 유리온실은 그야말로 미래의 농업을 바꿔줄 농업의 새로운 희망으로 포장되기에 충분했다.1992년 7월 과학영농기술 보급과 수출을 목적으로 포철은 광양제철소에 3,600평 규모의 첨단유리온실을 준공 한다. 이 유리온실은 제철소의 폐열을 활용하며 온도·습도·급수·액비공급·농약분무 등
낙농가의 고령화 현상, 부채증가, 유사비 증가, 번식 간격 증가 등이 낙농가 경영 압박의 원인으로 나타났다. 한국낙농육우협회 낙농정책연구소(소장 조석진)는 지난달 29일 ‘2013 낙농 경영실태 조사’발표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번 조사는 최근 국내 낙농 경영 현실과 당면 과제에 대한 파악을 위해 실시된 것. 조사결과에 따르면 낙농가의 연령은 50~60대가 75.8%로 고령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낙농가의 89.7%는 가족노동 중심이며, 고용노동은 10.3%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낙농부문의 후계자 문제가 점차 심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신규·후계농 육성을 위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평균 부채규모는 2억1,600만원이며, 시설투자 35.6%, 쿼터구입 28
전북 익산에 위치한 6,500평 규모의 유리온실, 김민수(가명) 대표를 중심으로 구성된 A농업회사법인이 이를 운영하고 있다. 온실은 정부 지원으로 지어졌지만 경영난으로 인해 부도를 맞았고, 지난해 4월 A법인이 해당 온실을 20년간 장기 임차했다. A 법인이 유리온실 절반인 3,000평에서 백다다기 오이를 재배하는데 드는 운영비는 월 5,000만원. 김민수 대표는 이를 “돈 놓고 돈 먹기”라고 표현하면서도 “그래도 돈이 되는 사업”이라며 유리온실 운영 이유를 밝혔다. 실제로 오이는 개당 600원, 하루에 1만개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니 벌어들이는 수익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기업이 아닌 일반 농민의 입장에서 유리온실은 “실패한 정책”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유리온실 규모화, 김 대표 “농업의 선도역할”
농산물 시장 개방 때마다 고개 든 정책 원재정 편집부장농식품부가 유리온실에 처음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진행될 무렵인 91년이었다. 수입 개방에 따라 선진농업기술로 선택한 아이템이 유리온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보니 대부분의 농가들이 버티지 못하고 도산했다. 보조금 중심으로 지원되다 보니 준비없이 농민들이 유리온실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초기 투자비용, 생산비를 감당 못하게 됐다. 그러다 MB정부 들어 FTA 본격 추진되면서 2008년에 또 다시 첨단원예시설 단지 구성을 계획하고 지원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90년대에 비해 20년이 지나 다시 거론된 유리온실 사업에 무언가 개선된 것이 있어야 하는데 새로울 것이 없다. 지열 등 신재생 에너지 사용 등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처럼 빠르게 변화해 온 사회가 또 있을까? 지금도 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그치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다 볼 새도 없이 숨 가쁘게 질주해왔다.불과 10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빠른 속도로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정보화, 지식사회로 급속하게 치달아 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양적 팽창과 경제적 풍요만이 살 길이라고 믿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오죽하면 부자가 되라는 인사가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되었을까.경제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은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지배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성장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유용할 줄 알았던 이 신화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