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눈앞에 다가왔다. 또다시 예년과 같이 농민들은 농촌을 위해 그래도 무언가 할 수 있을 때라고 소박한 희망을 품고, TV나 언론 지상에서 보던 얼굴을 모처럼 보게 된다. 농촌을 위한 현란한 여러 약속도 조만간 농가 곳곳에 제시될 것이고.그러나 그런 희망에 차고 굳건한 약속은 지금까지 제대로 지켜진 바 없다. 선거철에 등장했던 약속은 늘 그렇듯 실현되지 않고, 다음 선거에서 조금 형태를 달리해 상투적으로 반복되어 유포된다. 이는 대부분의 공약이 실현되지 않고 끝난다는 점에서 총선이건 대선이건, 혹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리 차이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2018년 10월 어느 날 박형대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한테 연락이 왔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 인터뷰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도올 선생은 지난 대선 때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로 ‘풍요로운 농촌건설’을 주창했다. 농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사라지는 이때 당대의 석학이고 철학자인 도올 선생이 농업을 이야기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부터 도올 선생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인터뷰라니 너무 반가웠다.그런데 전남 장흥에서 농사짓는 박형
[한국농정신문 홍기원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본지는 2000년 11월 27일 첫 신문을 펴냈다. 본지의 첫 1면 톱기사 제목은 “이러다 농민 다 죽는다”였다. 당시
새해가 밝았다. 늘 같은 해와 달이 뜨고, 대개의 일상이 반복되며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365일을 주기로 하여 새로운 희망을 품고 다시 신발 끈을 매기 위해 새해의 소망을 가진다. 지난해의 아쉬움과 실망, 실패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본능이 아닌가 싶다.고령화되고 있는 농민들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의지를 가지고,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라는 감정을 유지했으면 한다. 여전히 우리농민과 농업, 농촌의 발전을 위해 생산현장과 정책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농민이 주체가 돼 농업·농촌문제를 스스로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1982년 3월 충북 음성군 금왕성당에선 신군부 전두환정권이 들어서고 최초의 대중 집회가 치러졌다. 전국의 농민 1,500여명이 모인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가 열린 것이다.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는 5.18광주민주항쟁 이후 최초의 대중집회이자 부당 농지세 시정을 촉구한 최초의 농민투쟁이다. 당시 농지세는 갑류농지세와 을류농지세로 나뉘었다. 갑류농지세는 벼를 생산하는 농지에 부과했고 을류농지세는 과수·특용작물·채소 등을 생산하는 농지에 부과했다.그런데 이 두 가지 농지세 모두 농민들이 부담하기
책꽂이에 유난히 눈에 띄는 책이 한 권 꽂혀 있다. 전남 순천시 문해교실 할머니들의 자서전을 구술한 책이다. 책의 제목은 ‘내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더냐’였다. 제목부터 참으로 맛깔스러웠다.지난 30년 동안 여성농민운동은 투쟁의 자양분은 풍부했지만 여성농민들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고 홍보하는 일은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책을 보면서 우리는 인생을 알고 있을까? 모든 회원들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가야할 목표지점을 인식하고 함께 걸어가고 있을까? 많은 질문을 던진다.전여농 30년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1950년대 초 어느 여름날이다. 초등학교 5학년 임봉재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보리밥 소쿠리를 찾았다. “그때는 보리밥도 간신히 먹을 때였어요. 여름에는 소쿠리에 보리밥을 담아 처마 밑에 두고 학교 마치면 그걸 꺼내서 점심으로 먹었죠. 그런데 그날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부엌에 가서 가마솥 뚜껑을 열어봐도 뭐가 없더라고요. 방안에 계신 어머니가 인기척을 듣고는 모기소리로 ‘봉재야 봉재야’ 하고 부르셨어요.”방문을 열어 보니 어머니 혼자 아이를 낳으셨다. “어머니가 물 한 그릇 달라고 하시는
언니네텃밭, 왜 언니일까? 누나가 아니고. 예로부터 의좋은 형제 얘기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의좋은 자매 얘기는 찾기가 어렵다. 심지어 심리학에서는 여성들끼리 갖는 일반적인 감정을 질투로 분석하기도 한다.그러나 언니라는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언니는 여성들끼리 나누는 연대애이고 자매애이다. 언니는 언니들이 짓는 농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언니들끼리 주고받는 살림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주체들끼리의 관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의미로 텃밭은 말 그대로 살림(먹거리)의 밑천이다. 텃밭이 있어 밥상
또다시 국익이란 미명에 제물이 된 농업우리 농업은 WTO라는 틀 안에서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라는 보조장치에 의지해 휘청거리면서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해왔듯이 국익이란 미명 하에 또 다시 이 땅의 농업을 제물로 삼은 것이다. 역대 정부들은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누구를 위한 국익인지도 모르는 국익을 위해 농업을 희생해 왔다.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수출이 중요하다고, 수출을 위해서는 농업이라는 곶감을 뭉텅뭉텅 빼 줘가며 거래를 해왔고 국익을 위한 거라고 했다. 그들에겐 세계 시장이라는 무한한 경제 영토의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충남 홍성군 홍동면 ‘젊은협업농장 정민철 박사’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농업 쪽에서 나름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특이한 이력과 활동 탓이다. ‘박사’가 농사를 한다는 것도 의외인데 협업농장까지 운영하고 있다. 마을, 농촌, 공동체는 정민철 박사와 연결되는 단어들이다. 농업경제학이나 농촌사회학을 전공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정민철 박사는 미생물학 박사이다.“경주가 고향이예요. 아버지는 학교선생님이셨죠. 학교는 대구에서 다녔구요. 공부만 했을 뿐 농사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식량주권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일까? 우리가 쌀도 자립한다는데…(현재는 자립도 85%). 의아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대의 밥상을 분석해 보라. 국내산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아마도 25~30% 정도면 감지덕지일 것이다. 보조금의 산물로 저가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수입농산물이 이제는 식탁과 우리의 내장을 휘젓고 들어와 주인인양 버틴 지 오래이다.그렇다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식량주권 운동이 단순히 우리농산물 먹기라는 얘기는 아니다. 전여농의 식량주권운동은 내부자료에 ‘식
참으로 민망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검찰개혁을 위해 시작된 일련의 상황들이 나라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이 어디일지 도대체 예측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태풍과 역병에 맞서고 있는 농민들의 마음은 더욱 착잡하다.“내가 백남기고, 우리가 백남기다”며 분노해 일어선 많은 시민과 농민들의 힘으로 세워진 문재인정부의 농정에 농민들의 신뢰는 무너지고, 시위에 ‘상여’까지 등장했다. 문재인정부 들어서서 처음 등장한 상여라고 한다. 그리고 여성 농민들은 청와대 앞에서 호미를 들고 농업을 살려내라는 구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전남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에서 나서 한 번도 주민등록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어. 군대도 안 갔고, 전농 의장할 때 서울 왔다 갔다 한 거 빼고는 타지에 적을 둔 적이 없어. 그야말로 토박이야.” 문경식씨는 대를 이어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전형적인 농민이고 농촌사람이다.“10살 때부터 할머니 손잡고 농사일 배우러 다녔어.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지. 10식구가 한 집에 살았는데 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그는 전남 보성의 가난한 집안 7남매 중 넷째,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세분의
정치세력화는 무엇인가? 정치세력화의 방식은 무엇인가? 대중조직과 정치운동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 수많은 고민과 쟁점을 여전히 안고 있는 이슈가 정치세력화이다. 여성농민에게 있어서 정치세력화란 여성의 대표성만이 아니라 농민의 대표성을 고려하는 두 마리 토끼 모두를 품에 안아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그래서 여성농민운동에서 정치세력화는 진보적인 민중단체, 진보정당 운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모두 살펴보기에는 시간과 지면의 한계, 개인 역량의 한계 상 제한적이고 부분적일지라도 여성농민운동사에 나타난 여성농민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선제공격에 이어 대일 경제전쟁이 선포되었다. 이런 저런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객관적인 데이터를 놓고 그 가능성을 점검해 보자. 먼저 한국의 대외 경상수지를 살펴본다.2018년 기준 한국의 대외 경상수지는 2015년 최고점을 찍은 뒤 2018년 764억달러를 기록 중이다. 그 내용을 보자면 동남아 935억달러로 최고를 기록하고 있고 그 뒤 중국 491억달러, 미국 247억달러를 기록했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김대중정부 시절, 김성훈 농림부 장관은 유기농업을 권장하며 친환경농업육성법을 제정했다. 그 시절 경기도 양평군 팔당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팔당 상수원 유기농운동본부를 만들었다. 팔당 인근은 한강 상류지역이자 상수도 취수장이 있어 물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농사도 유기농으로 짓자는 의미다. 한강물을 상수원으로 사용하는 서울시에서 지원하고 농협도 힘을 보탰다.팔당 지역은 서울과 가까워 오래 전부터 근교농업이 발달했고 시설채소가 주로 재배됐다. 관행으로 짓던 농약·비료 농사가 정부의 친환경농업육성 정책에 힘입어
여성농민운동을 정리하면서 많은 순간 여성농민들에게 ‘주인’이란 단어가 그냥 구호이고 사전적 의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주인? 생산의 주인? 농협의 경우도 주인이라는 말이 무색한 대표적인 기관의 하나이다.농협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증진과 농민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하기 위하여 설립된 특수법인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묻는다. 과연 농협이 여성농민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인 적이 있었는지? 여성농민의 사회경제
우리 농정이 길을 찾아야 한다. 농산물시장의 완전개방과 기후변화로 인해 농산물가격은 품목을 바꿔가며 폭락을 거듭하고 있고, 농가의 실질소득은 감소해 농가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곡물자급률은 23.4%까지 떨어졌고 농업인력 고령화율은 42.5%로 늘어났다.농지는 절반 이상이 비농업인의 손에 들어가 있고, 비농업인의 직불금 불법수령과 함께 임차농은 투명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정권교체로 국정방향은 바뀌었지만, 농정방향과 농민의 삶은 과거와 다를 바 없다는 탄식이 현장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새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난 마당에, 농정철학
‘압구정’은 한명회가 지은 정자다. 이후 압구정은 조선 말기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에게 하사됐다가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실각되면서 사라지게 됐다. 지금은 압구정, 정자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남아있고 부유하고 화려한 강남의 상징으로 남아있다.압구정은 한도숙 전 의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강남개발이 시작되기 전 압구정은 배받이었다. 한 전 의장의 아버지는 대지주의 마름으로 살았다. 지주보다 더 악독하다는 그 ‘마름’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착한 마름이었다고 한다.그래서 수십 년 마름을 하면서도 땅 한 평 차지하지 못했다. 한 전 의장은
“나는 56세, 한국에서 온 농민이며, 젊은 시절 희망을 가지고 동료들과 농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보자 노력하였던, 그러나 결국 실패만을 거듭한 많은 농촌지도자 중 하나이다.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가 끝나고 곧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더 이상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故 이경해 열사 유서 中).”2003년 9월 10일 WTO 5차 각료회의가 열리던 멕시코 칸쿤에서 한 명의 한국 농민 이경해씨가 바리케이트 위로 올라가 항의 시위를 하다가 “WTO kills farmers!”라는 편지를 남기고 반세계화 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