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팔’을 얘기하면서 군대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초·중·고등학교 학생이면 누구나 1년에 두어 번씩 위문편지를 써야만 했다. 내용이야 읽어보나마나 뻔했다.-눈보라 휘몰아치는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전방에서 총칼을 들고 휴전선을 튼튼히 지켜주시는 국군장병 아저씨들 덕분에, 저희들은 따뜻한 후방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며….(식)칼을 들고(총은 빼고) 취사반에서 무 배추를 써는 일로 일과를 채우는 취사병도, 남쪽 바닷가의 해안초소에 근무하는 병사들도, 행정반에서 펜대를 굴리는 서무병도…위문편지에서만큼은
1960~70년대엔 거의 대부분의 대중잡지들이 뒤쪽에 펜팔 난을 따로 두고 있었다. 이름과 나이 그리고 주소 정도만 간단하게 싣는 잡지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잡지의 경우 취미에다, 혈액형에다(전투 지원병을 모집하는 것도 아닌데 혈액형을 왜 표시했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이성 친구의 조건을 함께 덧붙이기도 했다.그런데 펜팔을 연결해주는 매체는 잡지만이 아니었다.“그때 기독교방송에서 저녁 일곱 시에 하던 ‘세븐틴’이라는 청소년 대상의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개그맨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고영수 씨가 진행을 맡았는데, 방송 말미에 펜팔
2001년 12월의 어느 주말, 동해안의 한 콘도미니엄 객실에 삼사십 대의 중년 남녀 10여 명이 빙 둘러앉았다. PC통신 천리안의 문화유산 답사 동호회 회원들이다. 둘러앉은 한가운데에다 초등학생 책가방만큼이나 큰 방송용 다트(DAT) 녹음기를 켜두고서, 내가 그들에게 주문한 건 소싯적의 펜팔 경험담이었다. 그런데 저마다 목젖너머에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듯, ‘펜팔’이라는 화두를 던져놓자마자 5일 장터 튀밥 터지듯 왁자하게 쏟아져 나온다. 뭣이 그리도 재밌는지 박장대소가 끊이지 않는다.여자1: 펜팔 편지는 대개 이렇게 시작하지요.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내려간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1973년에 발표된 포크 듀엣 ‘어니언스’의 ‘편지’라는 노래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야 읍내 빵집일 수도 있고, 놀이터 철봉대 옆 벤치일 수도 있으며, 도서관 앞이거나 혹은 어느 공중전화 부스 앞일 수도 있다. 무슨 영문인지 답장을 끊어버린 소녀에게, 사내아이는 용기를 내어서 또 한 통의 편지를 썼던 것이다. 마지막이어도 좋으니 한 번 만나자고….이윽고 소녀가 나타났다. 반갑다. 그러나 소녀는 편지
-캬, 술맛 억수로 좋다. 월남에 있을 때 말야, 그러이깨네 다낭 밑에 호이안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베트콩하고 전투가 벌어졌거든. 그런데 그 전날 밤에 시내 나갔다가 콩까이들하고 어울려서 술을 억수로 퍼마신기라.-쯧쯧쯧, 백마부대 군기가 그렇게 형편 없었등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술을 떡이 되게 마시게?-더 들어 보그라. 다음 날 밀림 속으로 들어가서 따다다다…쏘고 볶고 한참 전투를 하다가 발밑을 보이께네, 팔뚝만한 구렁이 한 마리가 쓰윽 지나가기라. 가만 둘러보이, 고놈이 둥지에다가 알을 가득 낳아놨더라고. 옳다구나 하고
시민아파트 입주민들에게 아파트가 생겼다는 것은, 먹고 사는 여러 문제들 중에서 ‘몸 둘 곳’이 해결됐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시에서 일자리까지 주선해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는 제가끔 밥벌이 전선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 벌이 수단이라는 것이 이전에 판자촌에 거주할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남자들은 대체로 건축현장 등에 나가 품을 팔았고, 여인들은 주로 보따리 장사를 했다. 혹은 부부가 함께 행상에 나서기도 했다. 건어물 행상도 하고, 옥수수도 쪄서 내다 팔고, 달고나 장사도 하고, 인근 동대문시장에서 양말 등속을 떼다가 주택
“아파트가 뭔지도 모르다가 시민아파트에 딱 입주를 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방이 두 갠데 방마다 각각 다락이 하나씩 있었어요. 그땐 가난한 집일수록 애들이 주렁주렁 많았잖아요. 그래서 아마 일부러 다락을 둘씩이나 만들어준 것 같아요. 물론 연탄 때는 부엌도 따로 있고 창문 열면 베란다도 있었고요. 시에서는 공식적으로 ‘11평 아파트’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한양공대 건축과 학생들이 실습 차 나와서 내부 면적을 자세히 측량을 해보더니, 실 평수가 9.1평이래요. 세상에, 지금 생각하면 좁아터진 공간인데, 그땐 거기서
-잘 들으세요! 이 포대 속에 동글동글한 구슬이 여러 개 들어있는데, 그 구슬에는 여러분이 입주해서 살 아파트 호수들이 적혀 있어요. 한 사람씩 차례차례 나와서 제비를 뽑으세요!1969년 12월, 창신동의 낙산시민아파트 28개 동이 완공되었다. 낙산아파트의 경우, 아파트 건축 부지에 살던 사람들을 멀찌감치 경기도 광주군으로 이주시키고 나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입주자들이 삼일아파트처럼 뚝섬 등의 임시거처로 나가서 지낼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손길로 제가끔 구슬 하나씩을 집어 들었다.-송칠복 씨는 15동 307호!-
1969년, 청계천의 무허가 판잣집들을 철거한 자리에 7층짜리 아파트 24개동이 들어섰다. 삼일고가도로가 그 해 3월에 완공되었고, 그 고가도로 옆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이름도 ‘삼일시민아파트’가 되었다.철거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서울시에서 지은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시민 부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를 지을 부지를 빌려주고, 그 곳에다 건물의 외형을 만들어 주는 것까지가 서울시의 몫이었고, 내부에 칸막이를 하고 문짝을 달고 하는 데에 드는 경비는 입주자가 부담했다. 그 부담액이 40만원이었다는데 매월 2,000원씩, 2
서울의 창신동 언덕바지를 타고 오르면 낙산(駱山)이라는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1960년대에는 그 일대가 또 유명한 ‘하꼬방촌’이었다. 나는 수소문 끝에, 그곳의 무허가 판자동네에 살다가 초기에 낙산시민아파트를 분양받아서, 20년 뒤 철거될 때까지 거주했던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1934년생 유재근 할아버지다.“군(軍)을 제대했지만 시골에서 뭐 해먹을 게 있어야지요. 그래서 지게품팔이라도 하자, 하고 상경한 때가 1950년대 말이었어요. 그땐 봉천동이니 어디니 하는 데는 가봤자 이미 사람들이 다 터를 잡고 있어서 판잣집마
“청계천에서 하꼬방 짓고 살던 시절 얘기? 아이고, 생각하기도 싫어. 지방에서 올라온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판잣집들 짓고 살았지. 뭘 해먹고 살았냐고? 그렇게 물어보면 곤란하지. 그냥… 빌어먹고 살았지 뭐. 남편이 중부시장에 가서 지게질도 하고 품팔이도 하고 그랬지만 공치는 날이 태반이고, 몇 푼 벌어봤자 애들이 한두 명이어야지. 그땐 워낙 굶는 사람이 많으니까, 저기 왕십리교회하고 성동공고 교문 앞에 가면 강냉이 죽을 끓여서 날마다 배급을 줬어. 우리 집 새끼들이 양재기 들고 거기 가서 배급이라고 타오면 식구대로 그거
2001년 가을.서울 시내 중심부의 광교 쪽에서 3.1고가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옛 청계천변 오른편에 평화시장이 나타난다. 평화시장을 지나 청계천 8가쯤에 이르면, 고가도로 아래쪽의 도로변을 따라, 언제 지었는지 그 연륜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퇴락한 잿빛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3.1고가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속에서 두 남자가 주고받는다.-저게 뭐 하는 건물인지, 맨날 지나다녀도 도통 모르겠어. 아마 20년도 넘게 저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데?-20년이 뭐야?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봤으니까 못해도 30년은 됐
1965년 봄, 광주시 학동의 일선이발관.난생 처음 정장을 차려입은 스무 살 청년 김호면이 이발소의 대형 거울 앞에 섰다. 이발소 주인이 김호면의 넥타이며 옷매무새를 손봐주며 뿌듯해 한다.- 야, 그렇게 차려 입으니까 3년 전에 세상 떠난 명카수 남인수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야. 멋지다, 김호면 이발사! 자, 차 시간 늦기 전에 얼른 출발해야지. 부모님 좋아하시겠다.김호면처럼 이발관의 꼬마로 들어가서 기술을 익힌 끝에 면허시험에 합격한 경우, 주인이 양복 한 벌을 맞춰 입혀서 고향에 보내주는 것이 60년대 이용업계의 관행이었다. 이
1964년 끝자락, 김호면은 신설동 무허가 이발관에서의 1년 동안의 ‘기술자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해마다 3월이면 이용사 면허시험이 치러졌는데, 이발소 근무 경력이 3년 이상 된 사람에 한해서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따라서 경력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그가 꼬마시절을 보냈던 광주의 그 이발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면허시험을 하루 앞둔 이듬해 3월 어느 날, 주인이 일찌감치 영업을 끝내고는 이발소 식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목청을 다듬었다.-내일은 우리 일선이발소에 큰 행사가 있는 날인데, 다들 알고 있
광주의 이발소에서 3년 동안 그럭저럭 기술을 익힌 김호면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꼬마’ 생활을 면한 뒤에 어느 정도 이발 기능에 자신이 붙으면, 업소를 옮겨야 기술자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친구의 소개로 그가 찾아간 곳은 무허가 이발관이 밀집된, 신설동 하천변의 판자촌이었다. 청계천이 복개되지 않았던 시절, 동대문에서 노벨극장에 이르는 개천가에는 무허가 이발소가 30군데도 넘게 늘어서 있었다.“간판도 뭣도 없이 판잣집 안에 이발 기구를 대충 갖춰놓고서 청계천변의 염색공장 노동자들, 막일하는 사람들
옛 시절, 도제식으로 무슨 기능을 익히겠다고 들어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답답함이 있었다.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간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에 광주의 변두리 이발관에 ‘꼬마’로 들어가 고생했던 김호면 씨의 경험담이다.“연탄불에 고데기를 달군 다음 물에 알맞게 식혀서 이발사에게 건네준다…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온도조절을 못 해서 몇 번이나 손님 머리를 태워먹을 뻔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기만 했지, 어떻게 하라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질 않아요. 왠지 아세요? 오래 붙잡아두고 꼬마로 부려먹겠다는 심보였지요.”따라서 ‘
1961년 겨울, 열다섯 살짜리 소년 김호면이 이발소에 취직을 했다. 광주시 학동에 자리한 ‘일선이발관’이다. 하지만 말이 취직이지 그의 신분은 좀 애매하다. 연습생도 아니고, 견습공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머슴도 아니다. 그 이발소 주인이 그를 무어라 부르는지 들어보니,-야, 꼬마야, 빗자루 가져와서 바닥 머리카락 좀 쓸어라!이런 식이다. 아하, 그는 ‘꼬마’다. 이제부터 ‘꼬마’는 그의 이름이고, 직함이며, 역할이다.당시 변두리 소규모 이발소의 인적 구성을 보면 이발소 주인을 정점으로 바로 밑에 ‘기술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
1961년 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에 태를 묻은 15살 소년 김호면이 집을 나왔다. 광주행 버스를 탔다. 그의 부모님은, 이제 국민학교 졸업해서 한글도 깨쳤으니 함께 농사지으면서, 정 공부를 하고 싶으면 이웃마을에 있는 서당에라도 다니라고 붙잡았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내가 8남매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어요. 형과 누나들은 타관으로 떠났지요. 장차 뭘 해먹고 살까 생각하니까 앞이 캄캄합디다. 우리 동네는 20호밖에 안 사는 쬐끄만 마을인데다 전기도 안 들어왔거든요. 농사라 해봐야 논은 없고 밭만 열 마지긴데 거기다 ‘청춘’을
인천광역시 계양구의 한 주택가 골목.청‧백‧홍의 이발관 표시등을 따라 들어가 허름한 밀창을 열면, 일곱 평가량의 공간에 이발의자 세 개가 조촐하게 놓인, 전형적인 동네 이발관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이발 경력 40년(2000년 12월 당시)의 김호면 이발사가 꾸려가는 ‘인정이발관’이다.김씨는 내게 간이 의자를 내어주고는, 동년배 손님의 머리에 가위질을 하면서 푸념부터 늘어놓았다.“내가 처음 이발을 배울 때만 해도 업소간 거리 제한이 있어서 사방 2킬로미터 이내에는 영업허가를 안 내줬어요. 뿐만 아니라 아무리 어린 남자애라도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발사는 ‘하이칼라 머리’를 창조하는 예술가였다. 자기 스스로가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말쑥한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맨 멋쟁이 이발사는, 자동차 운전사와 더불어 아주 부러운 직업이었다는 인상이 깊게 남는다. 이발사의 ‘사’ 자를 스승 사(師)로 쓰게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발사가 철부지 어린이들의 눈에만 우러러 뵌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철학자 김태길의 수필 ‘이발소’의 한 대목이다. 김태길은 1920년생이니 그의 ‘어렸을 적’이 언제쯤인지를 어림하는 건 어렵지 않다.실제로 1920년을 전후하여 많은 유학생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