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큰일이네. 이제 어떻게 해요?”마당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걱정스런 말투로 나를 맞았다. 읍내 군청과 농어촌공사 사무실과 농협을 다녀온 나의 어깨도 푹 처져있었다.“그러게, 어찌해 볼 도리가 없네. 다들 안 된다고만 하고.”마루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정말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필경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농지가 나왔다. 660평, 서 마지기가 조금 넘는 마을 앞 산언저리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논이었다. 서너 해 묵혀둔 탓에 메마른 풀이 우거져 볼품없지만 산골 농지로는 제법 널따란 것이 잘 갈아엎
면사무소는 오늘도 오전부터 도떼기 시장마냥 혼잡하다. 산업계장 앞에 늘어선 농민들은 연신 앞쪽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눈치다. 면사무소 여기저기선 삼삼오오 시끄러운 대화소리에 정신이 사납다. 농민들이 두 달 가까이 직불금 신청 상담을 하기 위해 모여들면서 연출된 광경이다. 본연의 업무는 마비된 채 산업계 직원이나 주민이나 할 것 없이 불편하고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산업계장은 평일엔 신청 상담 때문에 주말에 나와 업무를 보는 실정이라 했다.지난 이장단 회의에서는 결국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면장이나 군수는 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 같다.농촌에서는 예전의 어른들도 그랬지만 지금의 어른들도 종종 자녀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너는 손에 흙 묻히고 살지 말거라’. 그런데 힘겹게 농사지어 공부시키고 도시로 보내서 입신양명하면 자신을 길러 준 농촌을 돌아보는 이가 적다. 그들에게 농촌은 가끔 힐링을 위해 다니러 오는 풍경 좋은 동네일 뿐일까. 그 정도만 해도 다행인 것이 요즘은 투기하기 좋은 곳이라 보는
국민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농산물의 품질 뿐만 아니라 산업의 사회적 책임 요구도 증가하고 있는데, 2020년 세계적인 이상기후 발생과 함께 기후위기에 대한 화두가 큰 이슈로 떠오르면서 농업의 온실가스 배출은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대표적 협약은 2015년 12월 파리에서 출범한 파리기후협약으로 세계 195개국이 동참한 구속력이 있는 국제 조약이다. 이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의 협약 탈퇴가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졌다.우리나라는 2020년 10월 ‘2050 탄소중립
지난주 일요일 오후 마을가꾸기 사업으로 동네 주민들이 마을 앞 꽃밭조성을 하느냐고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온 동네 주민들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할머니들은 호미를 들고 꽃을 심고 형님들은 국수를 삶고 청년들은 기계를 가지고 나와 저마다 정성껏 힘을 보탰다. 큰 포크레인 두 대와 스키로다 한 대까지 떠들썩하니 지나가던 이웃동네 사람들도 멈춰서 지켜보기도 하고 수고한다며 음료수도 주고 가기도 했다.커다란 돌을 밭에서 실어와 멋지게 돌을 쌓고 저수지에서 물도 연결해서 인공 폭포도 만들고 화사한 야생화도 심고 보니 작은 꽃밭이 아니라 동
우리 동네 봉화는 추위로 이름난 곳인데, 올해는 봄이 유난히 빨리 찾아왔다. 사과나무는 사상 유례없이 삼월에 잎을 터뜨렸고, 진달래, 개나리는 사월 초입에 이미 만개했다. 겨우내 봄을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서둘러 오는 봄이 반갑겠지만, 농부들에게는 일찍 오는 봄은 몹시 불길한 징조다. 겨울은 순순히 물러가는 듯하지만, 봄이 오는 길목 곳곳에 추위를 곧잘 숨겨 두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삼월에 지나치게 포근했던 날씨가 사월에 차갑게 돌변해서 일찍 꽃을 피운 많은 농작물이 냉해를 입었다.이렇게 봄이 서둘러 찾아오면 연로하신 농부들도 덩달아
새벽 다섯시. 아내 알람에 깬다. 이사람 또 못 일어나겠지 짐작하며 다시 잔다. 설풋 자다가 다섯시 반쯤 됐을 건데, 이사람 아직 안일어났구만 동시에 느낌이 와 일어난다. 역시나 주로 아직 불이 안켜져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일어나소. 다섯시 반이네.” 화들짝 깨어나는 아내를 두고 다시 이불속에 눕는다. 마지노선으로 사십분에 맞춰진 내 알람이 울릴 때까지만이다. 단 십분의 달콤함.알람이 울리면 일어나 옷을 주워 걸치고 밖에 나가 차 시동부터 걸어 차를 뎁혀 놓는다. 겨울철에만. 앞 유리 성에도 제거. 얼른 들어와 화장실로. 운행 도
‘농민에게는 생산비 보장을, 소비자에게는 합리적인 가격을’. 전국양파생산자협회와 전국마늘생산자협회가 출범하면서 내건 슬로건이다. 모든 농민의 바람은 자신이 지은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서 빚 지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다.농산물의 제값은 생산비가 보장되는 가격이다. 그렇다면 농산물의 생산비는 누가 결정할 수 있나? 농민이 스스로 농산물의 가격을 결정하지 못하고 경매에 내맡기다 보니 정책의 기준이 되는 시장가격은 묻지마 식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묻지마 유통을 바꾸는 첫걸음으로, 마늘·양파 의무자조금관리위원회를 통해 양파와 마늘의 생산비
매년 초 전년도 사업을 평가하고 새해 이루어야 할 목표를 정하고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연시총회를 3~4건 준비한다. 끝난 총회도 있지만 아직 진행하지 못한 총회도 있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총회는 안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코로나19로 인해 간식은 물론 물도 내지 못하는 총회를 열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횡성군여성농업인단체협의회 총회날이다.여성농업인단체협의회는 여성농업인관련단체가 모두 참여하고 있고, 여성농업인센터가 사무국을 맡고 있다. 2013년 여성농업인들의 삶의 질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선 지역부터 여성농민들
얼마 전 아내가 페이스북 페이지에 “혁주와 지숙이의 보릿고개 넘기 대작전”이란 게시물을 올렸다. 먹고 살기 빠듯해진 살림살이 극복을 위해 고민하던 끝에 1구좌당 5만원씩 후원하면 딸기, 딸기쨈, 딸기주스 등을 3월부터 배송하는 이른바 농사펀드를 제안하는 내용이었다.페이스북에 게시한 직후부터 많은 분들의 후원과 구매가 이어졌다. 아내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전화, 문자, SNS를 통해 많은 연락이 왔다. 그중에는 20여년 만에 연락이 닿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동창 녀석도 있었고 살림살이 서로 뻔한 농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심지어 딸기 배송
한국고용정보연구원은 해마다 인구소멸지수를 발표한다. 자료에 의하면 2020년 12월 기준으로 전국 228개 시군구 기준 소멸위험 지역은 105개(46.1%)이다. 만 20~39세 여성 인구를 만 65세 이상 인구로 나누어 낸 지수로써 0.5 이하로 떨어지면 소멸 위험지역으로 분류된다.계산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이 발표가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지표를 근거로 지역민들은 지역소멸의 위기감을 크게 느끼게 되고, 정치인들은 지역소멸 관련법 추진으로 유권자 환심을 사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예산 확보에 활용하고 있다.지금 국
Local. ‘지역의, 일부의’라는 의미의 영어로 국내에서는 지역, 지방 혹은 지방민, 즉 어느 지역의 원주민을 일컫는 전문용어처럼 쓰인다. 누가 언제부터 사용한 것인지 요즘 로컬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비수도권 지자체의 사업들이 넘쳐난다. 특히 청년을 대상으로 한 지방문화사업들은 ‘로컬’이라는 용어를 남발하고 있으며 몇 도시청년들은 이렇게 애매모호한 개념 안에서 어떤 이익을 얻고자 한다.요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클럽하우스라는 소셜앱에서 소위 ‘로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인 방이 열렸고 거기에 들어가서 대화하는 사람들을 살펴
이번 명절은 다들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는 유난히 사람들의 정이 그리웠답니다. 일 년에 두세 번 밖에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도 못 보고 영상으로 세배를 하는데 너무 아쉽고 허전해서 명절 내내 마음이 짠했습니다.코로나는 우리에게 어려움도 많이 주지만 반면에 사람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가족 내 동네에 대한 작은 것들 하나도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작년 말에 부녀회장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총무야 뭐하냐 우리집에 온나.”언니네에 가보니 부녀회 임원과 낯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안녕하세요. 저
새해가 시작됐다. 아무리 겨울이 추웠다 해도 소한 대한 다 지나고 입춘이 코앞이니 두터운 얼음 밑 개울물도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를 것이다. 이제 슬슬 기지개를 펴고 농사를 준비할 때가 오고 있다.새해가 됐다고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지만 갖가지 보조사업 문자가 새해임을 일깨워준다. 농사작목에 따라 친환경농가, 사과농가, 그 외 과수농가, 임산물농가, 과채류 등 각 행정 부서마다 진행되는 보조사업이 줄줄이 문자와 카톡으로 날아왔다.1년 농사를 시작하려면 농가마다 필요한 자재들과 수량을 체크하고, 각종 신청서들을 빠짐없이 챙기기 위해 정
지난해 연말에는 농특위에서 진행하는 농지실태 조사를 하느라 좀 바빴습니다. 늦게 출범한 농특위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고, 실효성이 없더라도 실태라도 파악하면 성과라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조사가 진행되면서 관념적으로만 생각했던 농지소유와 경작에 대한 현실이 절망으로 다가왔습니다. 도시인들의 불법소유와 상속농지에 대한 대리경작, 직불금 부당수령까지. 평생 마을을 떠나지 않고 농사만 지어오신 형님들도 누구 땅인지, 누가 경작하는지 모르는 필지가 많았고 농어촌공사에 땅을 넘기고 임차농이 된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땅에 손발을 묻고, 먹
3일간 춥고 4일간 따뜻하다는 의미로, 주로 우리나라의 겨울철 날씨 주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올 겨울은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한파가 열흘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1월 새해 벽두부터 북극의 냉기가 우리나라로 내려오면서 매서운 한파가 한반도를 휩쓸고 있다.작년 여름 59일 동안 내린 폭우가 생각이 난다. 59일 동안의 폭우 속에서도 농민들은 조금이라도 더 농산물을 수확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농산물 수확량이 평년의 70%를 밑돌았다. 생산량이 30% 이상 줄었으니 당연히 농산물 가격은
지난해 횡성여성농업인센터에서 진행한 프로그램 중에 여성농업인단체회장님과 여성이장님, 부녀회장님들과 함께 ‘여성농민으로 살면서 가정이나 마을에서 겪는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내용의 집단인터뷰가 있었다.다양한 이야기들 속에 불법소각문제와 농업용 폐비닐을 배출하면서 생긴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비닐 등이 포함된 쓰레기를 소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을에선 여전히 소각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농업용 비닐을 모아놓으면 재활용업체에서 수거해가고 또 돈도 받으니까 일거양득으로 기금 마련하기 딱 좋
날이 어두워지면서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매서운 추위와 함께 폭설이 내렸다. 긴급 재난문자의 울림은 덤이다. 평소 집에 자주 방문하던 택배기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길이 미끄러워 당장 배송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내용이다. 지금 받지 않아도 큰 상관없으니 차차 여건이 된 후에 갖다 주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우리집에 오려면 제법 비좁고 경사진 길을 올라와야 한다. 몇 년 만에 눈답게 내린 눈 감상을 하기에는 너무 많이 내렸다.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한파와 폭설 소식이 뉴스를 도배했다. 다음 날 이동을 위해 1톤 화물차
2018년 스웨덴 의회 앞, 10대 중반의 한 학생이 학교를 가지 않고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 학생이 이듬해 UN 기후정상회의에서 격한 감정의 연설을 뿜어냈다. 그녀의 이름은 그레타 툰베리이다. 기후위기를 국제적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환경운동가이다.우리나라에서도 시민단체 뿐 아니라 정치인 등 많은 국민들이 그의 활동에 공감하고 응원을 하고 있다. 그가 주장한 기후위기는 어느새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자리 잡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탄소중립사회를 선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어린 학생이지만, 그리고 그가
산업화와 공해재앙 이후 환경보호 운동은 늘 있었지만 전 세계적인 불황과 긴장상태가 지나고 나서 2000년대 초반, 국내에 본격적으로 ‘웰빙’ 바람이 서구권 유행 따라 불던 그때부터 한국에도 친환경, 유기농이라는 수식어가 대중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친환경농업의 중요성이 반영된 친환경농업육성법은 1997년도에 제정됐고, 신고제로 운영되던 인증이 2001년에 소비자들의 본격적인 요구가 반영된 인증제로 전환됐다. 내 기억에도 예전엔 ‘무공해 숯불갈비’처럼 상호나 제품명에 무공해, 웰빙을 많이 사용했고, 아직도 어르신들은 “이거 무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