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를 만드는 공정에서 가장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사항은 당연히 옹기의 재료가 되는, 질 좋은 점토를 확보하는 일이다. 봉황마을이 옹기 굽는 마을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일차적인 배경은, 질 좋은 점토가 주변에서 지천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옹기 공장의 주인이 설령 자기 소유의 논이나 밭이라 해도, 그 속에 묻힌 점토를 제 마음대로 파다 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광업권(鑛業權)이라는 말이 나온다. 광업법(鑛業法)에 의하면, 토지의 소유와는 별개로 땅속에 묻힌 광물은 원천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한다. 철
지붕 위에서는 두어 통, 박이 익어간다. 닭들은 모이를 찾아 마당을 종종거리고, 토방마루 한 쪽 절구통 옆에서 강아지가 졸고 있다. 초가집 기둥과 마당가의 감나무 가지를 연결한 나일론 줄에 빨래가 널려 있다면야 좋겠지만, 이미 걷어낸 뒤라면, 대신 참새 몇 마리가 조르라니 앉아서 재잘거린다 해도 어색할 것은 없다. 초가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변소가 있고, 변소와 나란하게 붙어 있는 외양간에서는 누렁소가 마당 쪽으로 머리를 내밀고서 게으른 입놀림으로 되새김질을 한다. 아, 싸리 울타리에 드문드문 나팔꽃이 피어 있다면 금상첨화겠다.자,
경로당의 할머니들에게서 시집살이 얘기를 듣는 동안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점은 당연히 ‘시어머니는 왜?’였다. 시어머니는 그 자신이 모진 시집살이를 겪었고, 자신의 딸들이 또한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어서 같은 처지에 놓일 터인데…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아들의 배우자에게, 요즘으로 치면 가히 ‘범죄적 수준’이라 할 그런 가해를 자행했던 것일까?할머니들은 당신들이 부당하게 당하고 겪었던 시집살이의 억울함과 설움을 절절히 토로하면서도,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그땐 시어머니들이 그냥, 다들 그랬어”라고 얼버무렸다.또 한 가지의
참 곱다. 우리 집 마당가에도 해마다 여름이면 이 꽃이 핀다. 길쭉한 통 모양으로 늘어진 이 붉은 꽃은 끝부분이 위아래로 벌어졌는데, 얼핏 보면 입술연지를 바른 여인이 입을 벌리고 화사하게 웃는 모양이다. 더구나 아랫입술에 해당하는 곳에 두 개의 하얀 이(치아)도 나 있어서 요염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꽃의 이름을 알고 나면 ‘화사’니 ‘요염’이니 하는 상상은 턱없는 사치임을 깨닫는다. ‘며느리밥풀꽃’이다. 그렇게 보면 아랫입술 위에 난 두 개의 하얀 그것은 이가 아니라 밥풀이 된다. 그 꽃에 얽힌 전설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한
“첫 임신을 하잖아요. 그러면 졸음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요. 비가 오는 날이면 더하지요. 방안에서 바느질을 하며 졸다가 손가락을 찔려서 피가 나도, 눈꺼풀이 천 근 만 근 내려앉는 걸 어떡해요. 그래서 밖에서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조용하면 잠깐 드러누워 눈을 붙였다가도, 시어머니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후다닥 일어나지요. 들키면 지청구 들으니까.”이북에서 피란 나왔다가 강원도 홍천의 산간마을로 시집을 갔던 엄금희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다. ‘졸음이 호랑이보다 무섭더라’는 그의 회고담 역시, 그 시절 다른 며느리들의 경험과 크
충주 변두리 아파트의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 중, 경상북도 김천 출신의 육명순 할머니(1928년생)도 18살 되던 해에 고향 인근 마을로 시집을 갔다고 했다. 이 할머니 역시 시집살이 중에서 가장 몸 고생을 했던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식구들의 빨래였다고 회고한다.“그 때 경상도 우리 사는 데서는 점심때면 늘 김치하고 콩나물을 넣고 ‘갱시기죽’을 끓여먹었어요. 여남은 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점심을 차려내고, 그 많은 식구들의 옷을 빠는 일을 나 혼자 감당했거든요. 솥단지 하나에는 죽을 끓이고, 또 한 솥단지에는 잿물을 넣고 빨래를 삶
옛 시절 군대 다녀온 사람들이 ‘졸병’ 시절을 돌이킬 때면 혹독한 ‘기합(얼차려)’보다, 살을 에는 추위보다, 그리고 배고픔이나 고된 훈련보다…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졸음’을 제일로 참기 힘들더라고 토로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을 지나 상병쯤이 되면 그 ‘닭병(꾸벅꾸벅 조는 병)’이 감쪽같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내가 충주의 한 아파트단지 경로당에서 만난 할머니들 역시 “시집살이 초년시절에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졸음이었다”라고 입을 모으는 걸 보니, 역시 옛 시절의 시집살이는 왕년의 군대생활과 빼닮았다.초저녁,
그 시절,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들에게 가장 힘든 노역은 빨래였다. 집안에 우물이 있는 경우야 그래도 고생이 덜한 편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빨랫감을 가지고 마을 공동 우물이나 냇가로 나가야 했다. 열여덟 살에 괴산에서 진천으로 시집 간 새댁 유정윤의 시집에는 다행히 앞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에서 유정윤이 맏동서와 함께 빨래를 한다.-뭣 하고 있어. 물 다 길었으면 두레박 내려놓고 빨래 헹궈야지. 할아버님 두루마기하고 아버님 저고리부터 먼저 헹궈서 빨리빨리 내다 널자구.-아이고, 손 시려라. 성님, 손이 기냥 얼어서 깨지는
서기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매주 일요일에 라디오 전파를 탔던 60분물 「일요다큐멘터리 이제는 그리운 사람들」(KBS제1라디오)은, 대체로 1970년대 이전까지의 우리 민중생활사를, 매주 주제를 달리해서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방송했다. 주제를 정하고, 대상을 선정하여 취재를 하고, 취재한 녹음물을 기초로 극본을 쓰고…하는 일체를 내가 혼자 맡아서 했다.서기 2003년 6월 첫째 주에 방송할 이야기의 주제를 우선 ‘시집살이’로 정했는데, 그러고 나니 취재를 어디로 갈 것인지가 난감했다. 취재대상을 찾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립문이 열리고 열예닐곱 살 처녀 윤희가 마당에 들어서더니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간다.-엄니, 오늘 웃마을로 시집간 작은집 분희 형님 다니러 오는 날 맞지유?-그래. 시방 고개 너머 어딘가 오고 있을 거야. 누가 마중이래두 나가 봐야 할 것인디….-그러면 지가 마중 다녀 올게유.폴짝폴짝 뛰며 동구 밖으로 나가고 있는 윤희가, 이런 노래를 흥얼거린다면 제 격이다. 형님 온다 형님 온다 / 분고개로 형님 온다 / 형님 마중 누가 갈까 형님 동생 내가 가지…. 시집 간 새색시가 처음으로 친정에 다니러 온다. 이십 리 길을 걸어, 이윽고
우리가 깜박 잊고 있는 흑백사진 시절의 삽화 중에는, 그 시절을 건너온 사람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아, 그 때 그랬었지”하고 공감할 대목이 또 하나 있다. 1960~70년대의 어느 주말, 이상훈 사진사가 ‘사진 영업’을 하는 용두산공원으로 가보자.-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됐습니다. 다음 일요일에 공원에 나와서 찾아가시면 돼요. 혹시 내가 안보이거든 ‘1번 사진사’를 찾으세요.-아, 참, 아저씨! 중요한 걸 빠뜨릴 뻔했네요. 사진에다 글씨도 넣어줄 수 있지요?-그럼요. 뭐라고 써넣을까요? -음, 고향 친구하고 용두산공원에
영화나 드라마 등의 영상물을 제작할 때 ‘로케이션 헌팅(location hunting)’이라는 말을 쓴다. 시나리오에 맞춤한 야외촬영 장소를 찾는 일이다. 그런 거창한 용어를 쓰지 않을 뿐, 용두산공원에 사진 찍으러 나온 관광객들이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사진을 촬영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공원 사진사에게 돈을 지불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바에.촬영장소로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이 ‘꽃시계 앞’이었다는 사실이야 앞서도 언급했었는데,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받아든 사람들이 한 결 같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대목이 있다.-꽃이 암만 이쁘면 뭐 하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