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곱다. 우리 집 마당가에도 해마다 여름이면 이 꽃이 핀다. 길쭉한 통 모양으로 늘어진 이 붉은 꽃은 끝부분이 위아래로 벌어졌는데, 얼핏 보면 입술연지를 바른 여인이 입을 벌리고 화사하게 웃는 모양이다. 더구나 아랫입술에 해당하는 곳에 두 개의 하얀 이(치아)도 나 있어서 요염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꽃의 이름을 알고 나면 ‘화사’니 ‘요염’이니 하는 상상은 턱없는 사치임을 깨닫는다. ‘며느리밥풀꽃’이다. 그렇게 보면 아랫입술 위에 난 두 개의 하얀 그것은 이가 아니라 밥풀이 된다. 그 꽃에 얽힌 전설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한
“첫 임신을 하잖아요. 그러면 졸음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요. 비가 오는 날이면 더하지요. 방안에서 바느질을 하며 졸다가 손가락을 찔려서 피가 나도, 눈꺼풀이 천 근 만 근 내려앉는 걸 어떡해요. 그래서 밖에서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조용하면 잠깐 드러누워 눈을 붙였다가도, 시어머니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후다닥 일어나지요. 들키면 지청구 들으니까.”이북에서 피란 나왔다가 강원도 홍천의 산간마을로 시집을 갔던 엄금희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다. ‘졸음이 호랑이보다 무섭더라’는 그의 회고담 역시, 그 시절 다른 며느리들의 경험과 크
충주 변두리 아파트의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 중, 경상북도 김천 출신의 육명순 할머니(1928년생)도 18살 되던 해에 고향 인근 마을로 시집을 갔다고 했다. 이 할머니 역시 시집살이 중에서 가장 몸 고생을 했던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식구들의 빨래였다고 회고한다.“그 때 경상도 우리 사는 데서는 점심때면 늘 김치하고 콩나물을 넣고 ‘갱시기죽’을 끓여먹었어요. 여남은 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점심을 차려내고, 그 많은 식구들의 옷을 빠는 일을 나 혼자 감당했거든요. 솥단지 하나에는 죽을 끓이고, 또 한 솥단지에는 잿물을 넣고 빨래를 삶
옛 시절 군대 다녀온 사람들이 ‘졸병’ 시절을 돌이킬 때면 혹독한 ‘기합(얼차려)’보다, 살을 에는 추위보다, 그리고 배고픔이나 고된 훈련보다…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졸음’을 제일로 참기 힘들더라고 토로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을 지나 상병쯤이 되면 그 ‘닭병(꾸벅꾸벅 조는 병)’이 감쪽같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내가 충주의 한 아파트단지 경로당에서 만난 할머니들 역시 “시집살이 초년시절에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졸음이었다”라고 입을 모으는 걸 보니, 역시 옛 시절의 시집살이는 왕년의 군대생활과 빼닮았다.초저녁,
그 시절,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들에게 가장 힘든 노역은 빨래였다. 집안에 우물이 있는 경우야 그래도 고생이 덜한 편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빨랫감을 가지고 마을 공동 우물이나 냇가로 나가야 했다. 열여덟 살에 괴산에서 진천으로 시집 간 새댁 유정윤의 시집에는 다행히 앞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에서 유정윤이 맏동서와 함께 빨래를 한다.-뭣 하고 있어. 물 다 길었으면 두레박 내려놓고 빨래 헹궈야지. 할아버님 두루마기하고 아버님 저고리부터 먼저 헹궈서 빨리빨리 내다 널자구.-아이고, 손 시려라. 성님, 손이 기냥 얼어서 깨지는
서기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매주 일요일에 라디오 전파를 탔던 60분물 「일요다큐멘터리 이제는 그리운 사람들」(KBS제1라디오)은, 대체로 1970년대 이전까지의 우리 민중생활사를, 매주 주제를 달리해서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방송했다. 주제를 정하고, 대상을 선정하여 취재를 하고, 취재한 녹음물을 기초로 극본을 쓰고…하는 일체를 내가 혼자 맡아서 했다.서기 2003년 6월 첫째 주에 방송할 이야기의 주제를 우선 ‘시집살이’로 정했는데, 그러고 나니 취재를 어디로 갈 것인지가 난감했다. 취재대상을 찾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립문이 열리고 열예닐곱 살 처녀 윤희가 마당에 들어서더니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간다.-엄니, 오늘 웃마을로 시집간 작은집 분희 형님 다니러 오는 날 맞지유?-그래. 시방 고개 너머 어딘가 오고 있을 거야. 누가 마중이래두 나가 봐야 할 것인디….-그러면 지가 마중 다녀 올게유.폴짝폴짝 뛰며 동구 밖으로 나가고 있는 윤희가, 이런 노래를 흥얼거린다면 제 격이다. 형님 온다 형님 온다 / 분고개로 형님 온다 / 형님 마중 누가 갈까 형님 동생 내가 가지…. 시집 간 새색시가 처음으로 친정에 다니러 온다. 이십 리 길을 걸어, 이윽고
우리가 깜박 잊고 있는 흑백사진 시절의 삽화 중에는, 그 시절을 건너온 사람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아, 그 때 그랬었지”하고 공감할 대목이 또 하나 있다. 1960~70년대의 어느 주말, 이상훈 사진사가 ‘사진 영업’을 하는 용두산공원으로 가보자.-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됐습니다. 다음 일요일에 공원에 나와서 찾아가시면 돼요. 혹시 내가 안보이거든 ‘1번 사진사’를 찾으세요.-아, 참, 아저씨! 중요한 걸 빠뜨릴 뻔했네요. 사진에다 글씨도 넣어줄 수 있지요?-그럼요. 뭐라고 써넣을까요? -음, 고향 친구하고 용두산공원에
영화나 드라마 등의 영상물을 제작할 때 ‘로케이션 헌팅(location hunting)’이라는 말을 쓴다. 시나리오에 맞춤한 야외촬영 장소를 찾는 일이다. 그런 거창한 용어를 쓰지 않을 뿐, 용두산공원에 사진 찍으러 나온 관광객들이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사진을 촬영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공원 사진사에게 돈을 지불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바에.촬영장소로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이 ‘꽃시계 앞’이었다는 사실이야 앞서도 언급했었는데,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받아든 사람들이 한 결 같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대목이 있다.-꽃이 암만 이쁘면 뭐 하노?
-이보라우, 15번! 그 자리 15번이 혼자서 전세냈간? 빨리빨리 찍고 비키라우!-나는 오늘 여기서 처음 찍는데 와 그리 성화를 합네까?-이것 차암… 가위바위보를 해서 순번을 정하든지 해야지 안 되갔네.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사진 찍을 장소로 가장 인기가 있던 꽃시계 앞에서 벌어지는 소란이다. 더구나 그 곳은 장소가 협소해서 세 팀이 한꺼번에 찍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30명의 사진사들이 제가끔 고객을 데리고 와서는, 서로 꽃시계를 차지하려고 다투다보니 사진이 맘먹은 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드디어 용두산공원 사진사들이 시내 음식
송도공원에서 관광객 대상으로 사진영업을 하던 피란민 출신의 이상훈이, 그 활동무대를 용두산공원으로 옮겼다. 서른 명의 허가받은 사진사들 중 결원이 생겨서 용케 한 자리를 물려받은 것인데, 운 좋게도 ‘1번’이었다.자, 이제 ‘용두산공원 1번 사진사’라는 완장을 찼으니 영업 준비를 해야 한다. 공원 안의 좋은 배경을 골라 찍은 사진으로 관광객들을 ‘유인’하기 위한 견본을 만드는 일이다. 동료가 이런저런 사진들을 붙인 판때기 하나를 갖다 준다.-자네 선임자가 서울로 이사 가면서 두고 간 사진 견본인데, 이래봬도 이 판때기에 붙은 사진의
이북에서 내려온 삼사십대의 실향민들이 사진영업을 해서 먹고 살겠다고 용두산공원으로 몰려든 데에는, 카메라 한 대와 사진기술만 있으면 별 밑천이 없이도 밥벌이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공원을 찾은 사람들에게 사진 값 일부를 선금으로 받은 다음, 부산 시내의 사진현상소에 맡겼다가 찾아다 주면 되었다. ‘영업방식’이 이처럼 단출하다 보니 마땅한 생계방편을 찾지 못 하고 있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고…결국 사진사들 자신이 질서를 잡겠다고 나섰다.-우선 공원에서 영업할 수 있는 사진사들의 숫자를 제한해야 합네다. 어드런 때에는 이 좁은 공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