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에 어린이 책을 함께 읽는 모임의 언니들과 함께 노년에 관한 동화를 읽었다. 그리고 ‘노년에는 무엇을 할까?’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모임의 대다수는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여가를 즐기며 남은 생을 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가리라. 그곳으로. 나는 왜 시골로 가고자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태어나 중소도시에서 자라, 서울에 사는 내가 그리워 하고 가고 싶어 하는 그 ‘시골’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시골’이라는 단어 속에 담아 놓은 여러 의미는 아마도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 정도로 수렴되는 것 같다. 대다수의 도시생활자들과는 달리 시골은 자신의 이웃
안나푸르나는 우리 귀에 익숙한 산 이름이다. 84년 여성산악인 김영자 씨가 우리나라 등산인으로 처음 올라 화제가 됐던 히말라야 준봉의 8천미터급 설산이다. 또 작년 산악인 박영석 씨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하산 중 실종된 곳이다. 안나푸르나라는 이름은 네팔어로 ‘곡식의 여신’이라고 한다. 8천미터 높이에 만년설이 뒤덮인 산이 ‘곡식의 여신’이란 게 얼른 이해가 안갈테지만 따지고 보면 설산의 만년설 때문에 계곡이 마르지 않고 거친 땅을 적시기 때문이다. 이는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서장성의 포도를 살찌게 하고 하미의 수박을 세계 최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안나푸르나란 이름이 곡식의 여신인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 없다. 중국의 전설에 곤륜산이란 산이 등장한다. 곤륜산이 어느 산을
거의 일주일 동안 밤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남이 쓴 글을 읽었다. 나도 책읽기라면 엔간히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아주 고역이었다. 장편소설이 열 개, 중단편 소설이 오십 편이었으니, 거의 일 년 동안 하는 독서량에 버금가는 양을 읽어치운 셈이다. 그것도 종이에 활자로 찍힌 게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로 읽었다. 사실 나는 모니터로 긴 글을 읽는 게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제대로 된 읽기를 해낼 수 없다. 아직 종이가 훨씬 친숙한 아날로그 세대인 것이다. 내가 고역의 독서를 감내해야 했던 이유는 어느 문학상의 소설 부문 예심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60편을 읽고 5편을 본심에 올리는 게 내 임무였는데 나 역시 소설을 써서 투고해 본 경험이 있는 터라 소설가 지망생들의 열정과
보슬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바닷가 길을 한참 달려 찾아간 전북 부안군 변산면 모항. 한적한 도로변에 위치한 아담한 양옥집 앞에 기골이 장대한 선생이 나를 맞았다. 푸근한 웃음을 띤 얼굴에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의 인상이 묻어났다. 그리고 마주 손을 잡으며 흠칫, 놀랐다. 그토록 크고 억센 손을 잡아본 적이 있었던가? 속된 말로 통뼈라는 느낌이었다. “아, 그 사람. 싸움에는 당할 사람이 없을 걸. 맹장이었지, 사나운 맹장.” 여러 농민운동가를 취재하던 중에 누군가가 그를 평한 말이었다. 하지만 첫 인상에서 나는 사나운 싸움꾼의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다. 물론 예순 중반의 나이답지 않은 형형한 눈매는 보통의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긴 했다. 거실에서 사모님이 내온 차를 마시며 이
오늘은 서울에서 ‘한중FTA중단 전국농어민결의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버스 근처에 다다르니 먼발치에서 벌써 몇몇 분들이 나와 서 있는데 말쑥한 차림의 농민들과 장화바람 그대로인 농민들의 모습이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반갑게 눈인사 손 인사를 나누고 보니 장화바람 농민들은 비 온다는 소식에 농사일로 도저히 집회에 참여는 못하겠고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배웅 나오신 사연을 쏟아 놓으신다. 부득불 사정상 못갈 때의 심정이 얼마나 무겁고 불편한지 그 마음 짐작하고도 남는다. 서울 서소문에 있는 농협중앙회에 도착했다. 농민들은 웬지 여기만 오면 뱃속부터 울화가 치미는지 모르겠다. 머리에는 ‘비료값 담합, 1조6,000억원’이 떠올라 어금니가 저절로 앙다물어진다. 엄밀히 말하면 농협중앙회는 없어졌다. 신경분리를 해 놔
“흥인군댁 고기 썩는 냄새 때문에 코를 둘 데가 없다”는 말로 대변되는 부정축재의 대표주자가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 이최응이다. 이최응의 아버지인 남연군은 끼니가 간곳이 없다고 할 만큼 비루하고 같잖은 종친이었다. 고종 2년 대원군이 권력을 잡자 이최응도 벼슬길에 오른다. 하위직으로 시작한 벼슬은 경복궁 재건 때 총책임자가 되며 이후 영의정을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총리아문이 된다. 이최응의 권력은 대원군이 실정하자 민씨 일파에 아부하며 이어간다. 그는 뇌물을 밝혀 곳간을 따로 만들고 물건들을 쌓아 놓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욕심 많은 도깨비가 관을 쓰고 앉은 꼴’이라고 놀려댔다. 아침에 일어나면 곳간점고부터하며 팔도의 수령방백들이 보내온 뇌물을 점검했다. 보내야 할 사람이 보내지 않으면 경을
귀농을 하면서 집 주위에 많은 과일 나무를 심었다. 농사를 지으니까 푸성귀는 말할 것도 없고 철따라 나는 과일도 직접 심어서 먹으려 했다. 과수원에서 나는 사과와 복숭아 말고도 딸기며 대추와 감, 포도, 배, 그리고 당연히 자두와 살구나무도 심었다. 그런데 크고 맛있는 살구가 달리던 나무는 십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나무좀이 파고 들어가 결국 고사하고 말았는데 그 후로 새로 심은 나무는 묘목을 잘못 사는 바람에 살구가 아닌 매실이었다. 결국 나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살구는 장날에 사서 먹을 수밖에 없는데 좀처럼 맛난 것을 만나기 힘들다. 엊그제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작은 아버지가 수박과 참외에 살구도 한 봉지 사오셨다. 크고 잘 익은 살구는 맛이 괜찮았다. 아이들 생각도 잊고 앉
올해 75세를 맞이하는 장두석 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 이사장은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다. 전남 화순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에 제적 당한 뒤 한국전쟁 시기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농민운동 등 한국사회의 변화·발전을 위해 재야에서 활동해 왔다. 민족생활의학전문가로 더 잘 알려진 장두석 이사장을 만나 최근의 근황과 민중의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도숙=유년시절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일제시대에 태어나시고, 해방을 맞은 뒤 한국전쟁까지, 한국사회 근현대사의 굵직한 일들을 몸소 겪으셨어요. 특히 선생님 이력을 살펴보니 유년시절 백아산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웅변대회에서 강제공출반
“이렇게 시간 장소 낭비하지 말고, 텃밭에 사용되는 수업비용도 있는데 시장에서 사먹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서울의 한 초등학교, 텃밭수업 중 지나가던 교장선생님의 질문이다. 나는 “많은 양을 수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텃밭 활동을 통해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작물을 기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수업을 하고 있거든요”라고 대꾸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다. 잎의 광합성과 증산작용, 뿌리의 삼투압작용 등으로 식물이 자란다고 과학시간에 배웠고, 가정시간에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와 그 영양소가 들어있는 과일과 채소, 제철재료를 책으로 배웠다. 즉 밥상에 올라오는 재료가 어떻게 자라는지 말과 글로 칠판으로 배웠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밥상에 오
70년대, 12시 5분 전이 되면 어김없이 KBS 라디오에서는 5분 드라마 ‘김삿갓 북한방랑기’가 흘러 나왔다. 김삿갓이 북한 전역을 돌며 북한 민중들의 삶이 억압과 비참함으로 점철돼 있음을 강조한다. 참으로 오랫동안 듬직한 성우의 목소리로 국민들의 북에 대한 감정을 고정시킨 장수프로였다. 남쪽정부의 북녘에 대한 이념적 편향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고 그에 따라 국민들은 농담을 하다가도 붙잡혀 사상검증을 받아야하는 곤욕을 치를 정도였다. 70년대 초만 하더라도 남쪽의 국력이 북쪽의 국력보다 약했었기 때문인지 북쪽에 대한 의도적 폄하는 국민들의 생활 속에 녹아들어 반북감정과 대결의식은 견고해졌다. 어느 날 ‘김삿갓 북한방랑기’가 사라졌다. 1964년 4월 첫 전파를 타고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가요를
아침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나왔는데 하늘만 잔뜩 찌푸렸을 뿐, 비는 오지 않았다. 비가 오면 단골 막걸리 집에 두고 온 책도 찾을 겸 들러서 술 한 잔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오는 날의 정취를 즐기는 방법이 빈대떡에 막걸리 마시는 것밖에 모르는 게 한심한 내 취향인데, 이 나이에 다른 취미를 찾을 수도 없다. 호우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많은 비가 온다니 그야말로 가뭄 끝에 단비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데 아버지는 주섬주섬 봉지를 챙겨서 사과밭으로 간다. 봉지를 씌우다가 미처 보지 못해 빠진 놈이나, 바람에 벗겨진 놈들을 찾아서 다시 씌우려는 것이다. 늙으신 아버지가 밭으로 가니 젊은 아들이 구경만 할 수는 없다. 사다리를 들고 나도 뒤따라 갔다. 점무늬 낙엽병은 더 번지지 않는데 진딧
이곳은 나주, 배로 유명한 곳이다. 농업인구의 상당수가 배 농가다. 일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4월부터는 놉 얻느라 동동거려야 한다. 수정에서부터 솎고 싸고... 이 일은 놉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 웬간한 농사 규모로는 자식들 대학보내기도 힘든 판이니 일은 더욱더 늘려야만 한다. 우리 집은 다행히(?) 규모가 적어서 우리 집 식구끼리 해결해 나갔다. 그런데 2년 전부터 배 농사를 망치는 바람에 애 아빠가 직장을 다니면서 오롯이 나의 몫으로 떨어져 버렸다. 배꽃이 피기 시작 할 때부터 내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 즐거워서 뛰는 게 아니라 무서워서 뛰는 심장 박동수... 감당해야 할 일의 몫이 엄두가 나질 않는다. 우리집은 천오백평 과수원이다. 이 쯤이야 거뜬히 두 부부가 해치우고 남아야 한다. 그러
지하수가 말라붙어서 과수원 관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저수지 마다 바닥을 드러내고 있지만 내 피부에 와닿는 가뭄대책은 없는 것 같다. 가뭄대책을 세우라며 대통령이 호통을 쳤다느니 경기지사가 말라붙은 논바닥에 소방호스를 잡고 사진을 찍고 이어 김황식 총리도 소방호스를 붙들고 섰다는 말이 들린다. 말, 말, 말, 말은 홍수가 났다. ‘장 단 집에는 가도 말 단 집에는 가지 마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장이 달면 모든 음식 맛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 집에는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나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 맛을 보기 위해 달려들었을 것이다. 반대로 말만 반지르르 하고 달게 하는 집은 귀만 아프고 행동거지에 해악이 될 뿐이기에 속담은 경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속담도 있다. ‘웃으며 한 말에 초상난다’ 말
그예 유월이 다 가도록 비다운 비 한 번 내리지 않을 모양이다. 내가 사는 곳도 두어 달 동안 소나기만 두 번인가 왔을 뿐 말 그대로 타는 가뭄이다. 올해는 도시에 사는 벗들로부터 여러 차례 가뭄을 걱정하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타들어가는 농작물이 없고 수돗물이 끊길 리 없는 도시에서 가뭄을 체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전화를 받으며 나는 거꾸로 그들의 삶이 또한 팍팍함을 느끼곤 했다. 자신이 어려울 때 비로소 남의 어려움도 보이는 법이니까. 그런데 4대강 본부의 누구는, 일찍 찾아온 불볕더위 탓에 가물다고 느끼는 것일 뿐 실제로 가뭄이 심각한 건 아니라는 해괴한 소리를 했단다. 과연 그들이 사는 나라와 서민, 농민들이 사는 나라는 같은 곳이 아님이 분명하다. 줄기가 말라가는 마늘을 캐어보
올해 일흔 한 살, 하지만 최성호 선생은 여전히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넘쳐보였다. 젊었을 적에는 힘깨나 쓰는 정도를 넘어 어깨 서넛쯤은 거뜬히 제압했을 풍모였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이 들려주는 얘기 첫 머리부터 심상치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 청년들이 많았어요. 가구 수도 백 가구가 넘었고. 우리 구만리 청년들은 그 때도 유명했어. 일부러 권투를 배워서 이웃 마을 청년들하고 싸움을 붙고 그랬으니까. 그냥 놀이가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었지.” 그렇다고 마냥 싸움이나 하고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 때부터 최성호는 청년들에게 책을 읽자고 제안해 독서클럽을 만들고 책을 사서 모았다. 군대 가기 전까지 모으고 함께 읽은 책이 수 천 권이었다. 아마 그 때의 독서가 최성호를 농민운동의 길로 이끈
21살 제 나름의 경제적 독립을 외치며 친구의 자취방으로 가방하나 달랑 메고 겹살이를 시작했다. 급식세대가 아닌 관계로 이때부터 나의 식단은 대학 학생식당에서 제공하는 먹거리와 외식이 중심이었다. 하루세끼의 식사를 해야 했고 분유나 스프 등으로는 채워지지 않아 아침조차도 학교 식당을 찾기도 했다. 학교식당은 엄마의 가장 큰 역할을 대체해준 것이다. 하지만 90년도 초반의 학교식당의 질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사회생활이 시작된 후 먹거리는 패스트푸드로 바뀌었다. 8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패스트푸드 음식에 익숙해 있었고 자연스레 세 끼니는 패스트푸드가 주를 이루었다. 냉장고는 대형마트에서 사온 각종 냉동식품과 햄류로 꽉 채워졌다. 또 이무렵 내 요리의 비결은 화학조미료와 각종 소스를 빼곤 생각도 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새 양수기가 안녕한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하루 일의 시작이다. 들리는 말로 양수기를 슬쩍하는 몰염치한 친구들이 간혹 있다고 하니 잘 살펴야 한다. 게다가 관정이 말라 물이 나오지 않는 상태로 모터가 돌아가면 타버리기 때문에 자주 살펴야 한다. 이미 반 마력짜리 한 대를 태워 버리고 새 기계를 달아 놓았기에 신경이 그리 쏠리고 있다. 과수원엔 열흘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대 주어야 한다. 경기지역에 가뭄이 극심하다. 5월 초에 한번 내린 비가 그 뒤론 가물치 콧구멍이 돼버렸다. 근 달포를 넘는 기간 비가 오지 않으니 초목도 농부도 말라비틀어진다. 각종시련이 그치지 않는다. 개방으로 박살을 내더니 가뭄이 농부들의 가슴을 저수지 바닥처럼 갈라놓고 있다. 가뭄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분수에 넘치는 언행을 일삼는 자에게 흔히 꼴값을 한다고 한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어 거들먹거리거나 제 처지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에게도 역시 그런 말을 쓴다. 요즘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외국을 돌아다니며 훈수를 두는 모습이 꼭 그렇다. 자신이 세계 경제를 이끄는 수장이라도 되는 듯이 유로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둥, 우리나라 경제가 세계의 모범으로 칭송받는다는 둥 별 같잖은 언사를 입에 달고 다니니, 참으로 백성된 자로서 민망하고 창피하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멀게는 구호물자로 죽을 끓이던 시절과 가까이는 아이엠에프로 국가적 굴욕을 겪은 일을 짐짓 잊은 체하며 훈수를 두는 모습이, 초등학생이 제 자랑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진짜 경제를 살렸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가톨릭농민회 부회장을 역임한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강원도 춘천 출신인 정성헌 이사장은 오랫동안 농민운동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해 왔다. 그는 가톨릭농민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2010년 12월부터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 “농민과 노동자가 잘 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한도숙=이사장님께서는 농민운동과 생명·평화운동을 해오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요. 이사장님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정성헌=운동을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한일정상회담 반대 시위에 참여해 19살, 대학 1학년 때(1964년), 잡혀
나는 시를 써서 시집을 한 권 내고 싶다는 꿈을 꿨지만 좌절되곤 했다. 그 이유는 물론 창작 능력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늘 한 번도 시를 쓰는 일을 삶의 앞 순위로 두지 못한 것도 있다. 예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는 것이 바빴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영등포노동자문학회에서 시를 가르쳐준 선배가 사진 찍는 사람이 되어 어느 날 고흥으로 왔다. “너는 너무 행복해 보여서 시를 못 쓴다. 따뜻한 산문집이나 써라” 그 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대하는 마음처럼 아팠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순 없지만 얕은 나의 삶이 보이는 듯 했다. 작년에는 70여 편의 시를 모아서 다섯 군데 쯤 출판사로 넣어보았으나 모두 퇴짜를 맞았다. 그러는 사이에 교육 관련 책을 내는 한 출판사로부터 교육산문집을 써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