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1972년이었다. 그와 함께 ‘하면 된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곳곳에 붙었다. 농협 창고의 긴 벽에는 붉은 페인트로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쓰였다.시곡마을에서는 아랫말과 웃말 사이를 나누는 작은 등성이를 밀고 그 곳에 마을회관을 지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시멘트로 블록을 찍어 지은 열두 평짜리 건물이었다. 그리고 마을회관은 곧 불어 닥친 새마을운동의 마을 거점이 되었다.우선 선택에게도 중대한 신변상의 변화가 생겼다. 십년 가까이 다니던 농협에서 나와 새마을운동 군지부의 총무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 해 처음으로 농림부에서 실시하기 시작한 독농가 연수에 다녀오고 나서 생긴 일이었다. 본래 고장에서 건실하
지형적으로 늪지대인 법수, 논농사가 주업이었던 이곳에 시설재배가 하나 둘 생겨가면서 지금 법수의 풍경은 하얀 비닐하우스 파도 같단 느낌이다. 단작화 되어가는 농촌의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도 토종을 지키고 가꾸는 이들이 있어 감사하다. 박미선(48세)씨는 여성농민회 회장으로 토종에 대한 책임으로 하우스 옆 논두렁을 이용해 황색얼룩콩과 보리콩을 심어 가꾸고 있다.첫해에 황색얼룩콩의 수확은 좋았다고 한다. 논두렁에 드문 드문 심어야 된단다. 황색얼룩콩을 수확해서 잡곡세트를 만들었다. 황색얼룩콩은 검은콩처럼 밥에 넣어 먹는다. 밥에 넣어먹으면 밤색이 약해진다. 늦콩으로 서리가 오고 나서 수확을 해도 된다.보리콩은 보리심을 때 심는다고 해서 보리콩이다. 늦가을 심어서 땅 속에서 겨울을 나고 이름봄에 올라온다.
결국 그 일로 선택의 청와대 행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새삼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여러 날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역시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연좌에 대해 절대 불만을 내색하지 말 것이며 하던 대로 정부 시책에 맞추어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것, 그리고 서둘러 공화당에 입당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그 무렵에 농촌 지역에도 공화당 당원을 배가시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선거에서 생각보다 많은 농민들 표가 김대중에게 간 것을 보고 박정희는 화들짝 놀랐다고 했다. 소문으로는 어찌 농민들이 자신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분개했다고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 전에는 농민을 당원으로 가입시키는 일에 별반 나서지 않았던 지방 공화당에서 부쩍 당원 가입을 독려하고 있었다. 물론
신문에 농촌의 지도자라는 소개가 나오고 시곡리의 마을길 넓히기가 실린 후 선택은 다시 권순천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신문에 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일이었다. 어쩌면 청와대에 초청을 받을지 모른다는 거였다. 귀를 의심할만한 이야기였지만 평소 신중한 권순천의 말이었으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정형 이야기를 청와대에서 본 모양이오. 아직 날짜가 잡히지는 않았는데 전국의 농촌에서 젊은 지도자로 꼽히는 사람 오십 명 정도를 청와대로 초청할 계획을 잡고 있어요. 도 별로 숫자를 책정하는데 충청도에서는 정형을 추천하였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그렇게 될 거요.”언뜻 그런 이야기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었다. 대통령이 시골에 가거나 농촌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걸 즐긴다고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책은 질문을 던진다. 먹거리가 풍부한 이 시대에 먹거리 부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불합리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편에선 먹거리를 제대로 소비하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이 증가하고 한편에선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이 몰락하는 딜레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데도 먹거리에 대한 불신이 갈수록 커지는 현실은 또 어떻게…?윤병선 건국대 교수의 새 책 「농업과 먹거리의 정치경제학」은 위의 질문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역사적, 구조적으로 분석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농식품 체계의 형성 과정, 미국과 국제기구의 비호 아래 농업과 먹거리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온 초국적 농산업 복합체의 사례, WTO, FTA, TPP로
괴산에 들어온 지 3년차 신참내기로 남편, 17개월 딸, 강아지 네 마리와 살고 있다. 토종콩 농사도 짓고 공부도 한다. 종자의 중요성을 다룬 글을 봤을 때 ‘이건 내가 할 일’ 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대를 물려온 씨앗을 받아 들었을 때 그 뭉클함을 잊을 수가 없다. ‘피고 지고 또 피며 수대에 걸쳐 살아온 씨앗이라니…. 생명이 유한한 ‘내 존재’를 넘어 다음 세대에게 전할 것은 이런 씨앗이어야 하지 않을까.’ 전여농 토종사업단에서 일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나섰다. 덕분에 전국 곳곳을 다니며 농사짓는 언니들을 만나 토종씨앗 현장을 돌아볼 수 있는 행복을 누렸다. 귀농 첫 해 언니들에게서 얻은 노란콩 1kg, 호랑이콩 1kg을 심어서 가을에 수확하고, 작년에는 지난
어딘지 오만한 끼가 흐르던 기자는 떡 벌어지게 차린 점심상과 면장이 찔러준 봉투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나자 태도가 바뀌었다.“사실 전국 아무 마을에나 가서 취재해도 되는데, 서울 근처 가까운 데서 해도 되고요. 권국장님이 굳이 부탁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신문에 한 번 실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청와대에서까지 각별하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안이니만큼 이런 기회는 평생 한 번 있을까말까지요.”맥주잔을 쭉 비우며 기자가 생색을 내자 면장이 얼른 잔을 채웠다.“모쪼록 잘 좀 써주십시오. 우리 면이야 충청도 산골이지만 그래도 전 면민이 한데 뭉쳐서 정부 시책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걸 강조해주시고요.”시골 면장으로서는 이만한 기회도 없을 터였다. 그런 것을 꿰뚫
마을에서 길을 닦을 준비를 하는 동안 선택은 면 직원과 다른 동리의 젊은이 두 명과 더불어 도청소재지가 있는 ㅊ시까지 가서 시멘트를 섞고 철근을 넣는 법 따위를 배웠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길 공사에 들어갔다. 열흘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불과 이레 만에 끝났다. 칠십 여 명의 노동력은 그렇게 엄청났다. 회칠한 듯 뽀얀 시멘트 길이 생기자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좋아했다.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엄청난 공동의 작업을 해냈다는 뿌듯함까지 더해져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흥분된 감정이 마을을 휘감았다. 면내에서 제일 먼저 길을 닦은 시곡마을로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일부러 구경을 왔고 사람들은 새 길을 마치 제 집 앞마당이라도 되는 양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그리고 시멘트가 다 말라 사람들의 통행이 시
“아무리 그래도 알토란같은 문전옥답을 그냥 내놓으라고 하면 말이 안 되쥬. 대충 봐도 우리 땅이 들어갈 거 같은데, 그 땅을 마련할라고 우리 아부지가 오만 고생을 다 한 거야 동네 분덜두 다 아실 거 아뉴?”전에 선택에게 경을 친 적이 있던 호중이 선택의 눈치를 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제 아버지가 머슴을 살며 마련한 몇 뙈기의 논밭을 일구며 농사를 짓고 있었고 선택이 하는 일이라면 엔간한 일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시 농군의 자식이라 땅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다. 선택은 호중을 확실하게 눌러야 다른 사람에게서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천호중 씨가 한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이 일은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만큼 국민된 도리로서 거국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농촌의 정
임실 운암면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농사를 지어 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지금 살고 있는 정읍에 정착한 지도 벌써 30여년이 훌쩍 넘었다. 정읍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다양한 잡곡이 많지 않았다. 임실 고향에서 어머니의 시어머니, 오랜 역사를 품은 토종씨앗들을 받아 지금도 심고 있다.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종자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는 순전히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어머니가 살면서 땅이나 돈이 아니라 유산처럼 물려받았던 종자가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다. 종자의 중요성도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 될지라도 종자는 머리 배게 밑에 두고 자야 한다고.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야 하듯이 종자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온 삶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 지금도 소중한 씨앗들이
[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뭔가 글쓰기를 하고 싶어도 워낙 글재주가 없어서 안돼요. 농번기에는 약 먹고 죽고 싶어도 그 약 먹을 시간이 없어서 못 죽어요. 피곤하고 몸이 파김치가 되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 나이가 많아 뭐가 뭔지 통 모르겠어요. 이제 배워서 뭐하게요. 어떻게 쓰나요? 머릿속에서는 이야기가 뱅뱅 도는데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캄캄해져요.”「스토리두잉」의 저자 안병권 씨가 ‘이야기농업학교’를 운영하면서 전국의 많은 농민들에게 들었던 말이라고 한다.매주 기사마감을 앞두고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캄캄해지기는,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고된 노동으로 점철된 농민들이 “내 얘기를 말로 하라면 2박 3일도 하지만 글로 쓰라면 못 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법 하다.
“지역농협 지소에 협동조합 창립 발기인 대회 공고를 붙이려 하니까 농협과 경쟁하는 거 아니냐며 안 된다고 거절했다.”농협의 주인은 농민이라는데 협동조합을 만든 농민은 농협의 경쟁상대가 되는 현실. 들어갈 때는 주인, 나올 때는 주적??“농업경제학은 규모의 경제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데, 그러면 농업경제학은 알맹이 없는 맹탕이 되는 거다.”김홍국 하림 회장이 2세 한돈인 세미나에서 젊은 양돈인들에게 한 강의의 일부. 하림이 농민들로부터 지탄받는 이유가 보이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