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다섯 명의 남자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50대 전후의 남자들은 모두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름을 대면 알만한 소설가이고 그런 인연으로 우리 집으로 일종의 사전 견학차 온 것이었다. 마침 복숭아를 따던 날이었고 얼추 작업도 끝난 시간이었기에 시장에 가지 못한 흠집 난 복숭아를 한 바구니 씻어와 원두막에 둘러앉았다. 학교선생을 하다가 일찌감치 퇴직한 이도 있고 도저히 무슨 일을 하며 평생 살았는지 요령부득인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농사일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라 그런지 복숭아를 먹으면서 연신 농사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가만히 들어보니 영 초짜들은 아니었다. 토양이니, 미생물이니, 효소제재니 하는 전문(?) 농업용어들을 스스럼없이 구사하며 대
누구나 그럴 테지만 내게도 정체불명의 이메일이 오곤 한다. 개인정보가 숱하게 유출되었다니 아마 그렇게 흘러나간 메일 주소로 오는 듯하다. 나는 불행히도 소통을 잘 하지 않고 사는 쪽이어서 오는 메일 대부분을 열어보지도 않고 지운다. 진짜 중요한 일은 결코 편지로 오지 않으며 인간은 평생 동안 한두 통의 꼭 필요한 편지를 받는다는 소로우의 말을 충실하게 믿는 독자인 탓이다. 그렇긴 하지만 제목이 일단 낯익으면 클릭을 하여 열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물론 그런 것들도 대개 그냥 지웠어도 좋을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내가 속한 한 작가 단체에서 온 메일을 무심코 열었다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용은, 박정희를 다룬 영화를 제작하는데 제작을 돕거나 홍보위원으로 참여해달라는 것이었다. 저명한 인사
저는 곶감으로 유명한 경북 상주시 내서면 서원리에 살고 있는 두 딸의 엄마이자 3년차 농촌 초보새댁 유미경 이라고 합니다. 처음 제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땐 아침저녁으로 들리는 개구리소리가 시끄러워 밤잠을 설쳤는데 요즘은 매미 개구리 소리가 안 들리면 어색하기까지 하네요. 대도시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상주 시내에서 살다가 곶감농사를 짓는 남편을 따라 시내와 20분 거리인 내서면 서원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곳에서 생활하기 전까진 낭만적인 전원생활처럼 쉽게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볼 일이 있을 때면 시내와 20분 거리니까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농촌생활이라는 게 그리 넉넉하지 못해 치솟는 기름 값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생각만큼 외출하기가 힘듭니다. 시내에
태풍이 자주 몰려오는 듯하다. 7월에 불어 닥친 ‘카눈’은 별 피해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번 8월 28일 태풍 ‘볼라벤’은 많은 농민들의 가슴을 쥐어뜯어 놓았다. 게다가 먼저 발생한 14호 태풍 ‘덴빈’이 대만에서 머무르고 있다가 다시 북상하며 비바람을 쳐 설상가상 피해가 늘어날까 걱정이다. 태풍이 불면 걱정근심으로 밤을 지새우는 이들이 과수재배 농민들이다. 특히 배나 사과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근심걱정은 같이 있기 불편할 정도로 깊다. 그래선지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여기저기 안부와 위로 전화가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넓은 과수원에 즐비하게 떨어진 사과나 배의 모습이 대단히 선정적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추석을 가까이 두고 수확을 눈앞에 둔 상태여서 한 개만 떨어져도 아까운데 절반 가까이 떨어지고 나
대체 어쩌자고 날씨가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가뭄에 폭염이 이어지더니 마치 장마철처럼 구구장창 비가 쏟아진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여, 지난주에 큰 비가 내릴 때만해도 이제 해갈이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햇빛 한 번 제대로 나지 않고 비가 이어지니 오히려 가뭄이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물면 물이라도 퍼서 위급을 면할 수 있지만 속절없이 내리는 비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한창 복숭아를 따는 때인지라, 수분을 빠르게 흡수하는 복숭아나무 특성상 비는 몹시 해로운 존재이다. 복숭아의 당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소비자들도 비가 많이 올 때 복숭아를 샀다가는 오이만도 못한 맛을 감수해야한다는 것을 안다. 당연히 값은 폭락하고 복숭아 과수원을 하는 나 같은 농민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값이 떨어질
5,60년대의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들, 특히 농촌에서 겪었던 사람들은 대개 끔찍했던 가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 고통받은 이야기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겠다. 나 역시 농촌에서 태어나 아버지나 주위 어른으로부터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극도의 가난과 고통의 세월을 거창의 표만수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절하게 느꼈다. 마치 찰스 디킨슨의 소설에 등장하는 근대 초기 영국의 가난한 소년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선생이 살아온 내력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가난과 고통을 뚫고 농민운동가로 거듭난 선생의 모습은 단단한 바위와도 같았다. 선생을 만난 것은 거창의 한 병원이었다. 교통사고를
나는 서울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서울깍쟁이다. 유년기까진 친구들 거의 서울태생들이었고 서울 사람인 것이 우월한 것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며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다른 환경에서 땀 흘리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번 여름에 지리산둘레길 함양, 산청 구간을 걸었다. 뙤약볕 아래를 혼자 걷다 논과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운지 수줍음 많은 내가 먼저 인사 건네고 말붙인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는데 서울에서 왔다는 말이 선뜻 나오질 않는다. 당신은 뙤약볕 아래 일하고 계신데, 왠지 미안하다.서울여성회에서 ‘횡성으로 떠나는 즐거운 초록 휴가’를 다녀왔다. 언니네 텃밭 횡
정조대왕 때 서유문이란 사람이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온 후 쓴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 보면 숭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밥을 먹고 체했는데 숭늉을 마시고 체증이 내려갔다는 이야기다. 숭늉과 관련한 이야기는 임원경제지나 개인 일기들에서 많이 나타나는걸 봐서 중요한 음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신으로 북경을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에는 숭늉이 자주 등장하는데 중국의 기름기 많은 음식에 지친 위를 개운하게 하는데 숭늉만한 것이 없었나 보다. 숭늉은 밥의 전분이 열을 받아 분해돼 ‘포도당’과 ‘텍스트린’이 생기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소화를 돕는다. 바로 ‘텍스트린’이 소화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숭늉이 우리 음식에서 사라진 것이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다. 누룽지가 눌지 않는 전기밥솥의 등장이 숭
“농촌문제는 농민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 봐요. 농촌을 살리려면 국민들이 함께 노력해야 해요. 기본적으로 농업·농사가 ‘사람 살림’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처럼 훌륭한 게 어디 있나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농촌·농민의 삶을 그려낸 임옥상 화백은 농업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 같이 밝혔다. 이어 “농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아요. 도시 사람들에게 의식의 혁명이랄까 단초를 농사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농업의 중요성과 미래에 대해 강조했다. 시를 쓰는 농민인 한도숙 본지 사장과 농업·농민에 애착을 갖고 활동중인 임옥상 화백이 만나 농업과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현실 그리지 않으면 작가윤리에 맞지
며느리는 이 집 말고 아파트로 이사 갔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한다. 단독주택이니 겨울에 너무 춥고 보일러 기름값도 너무 들어가고 옛날에 지은 집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나는 싫다. “꼭 가고 싶으면 가렴. 나는 이 집이 좋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만 갸우뚱 했다. 작지만 앞마당에 잔디 깔렸고 꽃밭도, 텃밭도 있으니 삶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 것을 젊은이들은 모르나보다. 텃밭이래야 기껏 한 80평쯤 될까 말까 하지만 고구마, 옥수수, 마늘, 오이, 고추, 가지, 토마토, 부추, 상추, 쑥갓, 호박, 울타리콩에 참 여러 가지를 심었다. 그도 농사라고 퇴비도 사고 씨앗에 비닐에 살 것이 꽤 된다. 며느리에게 시장 가는 길에 무, 배추 씨앗 사오라고 했더니 “거기서 몇 푼 나온다고요. 힘들어요. 그만
존스타인벡의 출세작 소설 ‘분노의 포도’는 1930년 대공황시기 민중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후 ‘분노의 포도’는 가난한 농민들을 트렉터로 밀어버리는 자본의 비인간적 처사를 고발하여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진수로 곧잘 인용됐다. 농산물의 잉여가치를 올리기 위해 농장주와 자본가들은 포도를 농장에서 썩게 만들었고 배고픈 농민들의 인건비를 갉아먹었다. 이에 항거하는 농민들은 맞아죽거나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가 본 미국의 농업은 자본의 우악스런 힘으로 땅을 강간하는 수준이었다. 80년이 지난 지금 뭐가 변한 게있나? 여전히 자본의 착취는 여기저기서 음험하게 노동자, 농민들의 골수를 빨아대고 있으니…. 세계 식량 위기를 말하고 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바로 소설 ‘분노의 포도’무
방학도 다 끝나가는 중학생 아들이 아빠와 함께 할 숙제가 있다고 했다. 공부며 숙제며 모두 아내에게 미루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무심한 내게 함께 할 숙제가 있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들어보니 얼핏 수긍이 가면서도 이상한 숙제였다. 아빠의 직업을 체험하고 그 느낌을 적어오기라는 것이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숙제였으니 요즘은 교육이 좀 달라졌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공무원이면 거길 따라가서 체험하고, 택시운전사면 옆자리에 타고 체험한다는 말인가. 직업에 따라서 체험할 수 없는 아이들도 있을 텐데 일률적으로 그런 과제를 내준다는 게 우습기도 했다. 아버지의 직업 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첨부해야 한다고 했다. 아들은 보통 남이 아빠의 직업을 물
채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들도 사 보고, 언젠가는 채식을 하리라 결심만 앞세우는 내가 정작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파스타, 한우, 엠티나 워크숍 가서 먹는 바비큐, 떡볶이, 빵, 면 등이다. 이십대 후반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이유도 엉망인 내 식습관 탓이 크다. 뭘 해먹을 여유도 없을 만큼 바쁘기도 했지만 워낙 인스턴트 음식을 좋아하다보니 천 원짜리 김밥과 라면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다. 회복이 어려울 만큼 건강이 나빠지고 나서도 끝내 못 끊은 음식이 피자와 빵, 떡볶이였을 정도로 나의 식습관은 이상과 현실이 동떨어져 있었다. 그런 내가 언니네 텃밭 꾸러미 회원이 된 것은 올해 4월의 일이다. 회복되었나 싶었던 건강이 다시 한 번 나빠지면서 결국 식습관을 바꿔야할
네팔사람들은 순하고 느긋하며 욕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에겐 특별하고 절대적인 신이 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 힌두교는 삼라만상이 모두 신이다. 길거리에 개나 소나 모두 신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신이 바로 ‘시바’다. 비슈누와 브라흐마신이 힌두교의 삼주신이며 이들은 각기 다른 역할을 맡고 있다. 그중 ‘시바’는 파괴의 신이다. 그러나 속성을 알고 보면 파괴와 동시에 창조를 담당해 모순 관계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창조는 다른 것의 파괴로부터 일어나고 파괴는 새로운 창조의 모태가 된다. 바로 ‘시바’가 가진 속성은 자연주의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서양의 경험주의가 현대문명의 바탕이 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보듯 인간중심의 세계
칠월 초에 장맛비라고 한 번 퍼붓더니 소나기 한 줄금 없는 불볕이 연일 내리쬐고 있다. 수십 년만이라는 폭염이 계속되자 아니나 다를까, 과수나무가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33도 이상의 고온이 며칠만 이어지면 과수는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과일을 키우는 대신 씨를 여물게 한다. 후손을, 오직 후손을! 위협을 느낀 나무는 아직 익지도 않은 사과 속의 씨에 전력을 쏟는다. 하여, 구월 중순에야 수확하는 홍로가 칠월 하순부터 붉은 색이 나기 시작하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직 반도 자라지 않은 사과가 익어가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과 과수원에 비상이 걸렸다. 조금이라도 과수원 온도를 내려보려고 저녁마다 SS기에 찬 물을 담아 뿌려보지만 온종일 달구어진 대지의 기운을 얼마나
연일 폭염이 계속되는 날, 친한 작가들 몇이 가까운 월악산의 송계 계곡에 모였다는 소식이 왔다. 다른 일을 보고 모인 터라 거의 네 시가 넘은 시간에 도착했단다. 굳이 먼 발걸음을 하여 사람을 만나지는 않더라도 찾아오는 벗은 몹시도 반기는 터라, 서둘러 계곡으로 차를 몰았다. 30분 남짓 걸려 도착해보니 너럭바위에 음식을 펼쳐놓고 술잔이 돌고 있었다. 모두들 도시에서 살다가 물소리 청청한 계곡에 왔으니 흥겹기만 한 모양이었다. 나도 올 들어 처음 찾은 계곡이었다. 모인 사람은 나까지 열 명, 모르는 얼굴도 서넛 있었으나 다들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다.시간이 늦어서인지 계곡에는 우리뿐이었다. 허긴 월악산은 국립공원임에도 한적한 곳이다. 나들이 철이 아니면 주중에는 거의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경치와 물소
뜨거웠던 청년 시절 오익선은 1936년 생, 올해 우리 나이로 77세다. 여든이 가깝지만 건강은 별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정말 보기 드물게 큰 키였다. 186cm라니, 지금도 큰 키지만 예전에는 거의 보기 드문 거인에 속했단다. 키가 너무 커서 군대도 가지 못했다. 상당히 준수했을 용모와 더불어 지금 같으면 축복에 속했을 큰 키는 사는 동안 내내 불리하게 작용했다. 5.16 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은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들을 거의 범법자 수준으로 여겨서 각종 불이익을 주기가 일쑤였다. 합당한 이유로 면제받은 사람까지 공직에서 몰아내는 판이었으니 오익선은 공직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에서도 적잖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오익선이 태어난 발안은 땅이 비옥하고 저수지의 물이 마르지 않아 가뭄
‘참 소중한 나’‘나는 진실하고 정직합니다.’‘마당에 봉숭아꽃이 한창입니다.’‘어제는 소나기가 내렸다.’‘오늘 아침 텃밭에 들깨모종을 하고 학교에 왔다.’ 우리 배움터 학습자분들이 요즘 익히고 계신 문장이다. 우리 배움터 학습자분들의 평균 나이는 칠십육세쯤 될 것이다. 그 분들은 나의 학생이시자 스승이신 분들, 나의 어머니이시자 우리들의 어여쁜, 사랑스러운 어머니이신 분들...... 우리집 큰 아이가 첫 돌을 맞이할 즈음 시작한 이 일을 우리는 넷째 아이가 팔개월을 채워가는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거의 팔 년이란 시간을 어머님들과 배움을 함께 하고 있다. 도시살이에서 농촌살이로 삶의 주 공간을 옮길 때 우리가 가졌던 꿈은 적은 양이더라도 자급자족하기, 부모님의 배려 덕분으로 가졌던 우리
오랜 벗이 예순 살을 후딱 넘기기 전에 자신의 집을 짓겠노라 벼르더니 기별이 왔다. 집들이랄 것은 없지만 와서 인기척이라도 두라고 한다. 그래도 집들인데 빈손으로 가긴 뭐해서 두루마리 화장지 한 묶음에 가루비누 한통을 들고 갔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거품처럼 살림이 일어나라는 뜻으로 그리하는 거라니 세속을 따른다. 한 20년 전만해도 이사를 가면 축하선물로 성냥을 많이 가져갔다. 혹자는 성냥으로 불같이 살림이 일어나라고 그랬다고 한다.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냥을 가져가는 것은 조왕신과 관련이 있다. 조왕신은 한 집안을 관리하는 신으로 주로 불과 곡식을 단속하는 신이다. 혹은 부뚜막신이라 해서 불을 꺼트리지는 않는지, 끼니를 거르지는 않는지 한 집안의 소소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매년 섣달그믐
“농업이 교육이고, 교육이 곧 농업이라고 생각해요. 농업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자산을 자라나는 아이들이 보고, 배우고 또 닮아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농업과 교육에 대한 철학을 이같이 밝혔다. 제1호 진보 교육감으로 선출돼 무상급식, 학생인권, 농산어촌학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김 교육감을 지난 10일 경기도 교육청에서 만났다. 한도숙=취임2년째를 맞이하셨습니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경기도 교육 현안은 뭐가 있을까요. 김상곤=처음 교육청으로 들어와서 추진하려던 무상급식, 학생인권조례, 혁신학교 등과 같은 사업을 잘 진행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여러 가지 저항도 있었고, 상당히 주춤주춤 거리는 공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