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새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월이었다. 부녀자들이 단체로 관광을 가고 평생 집 밖에 나갈 일 없을 줄 알았던 아내가 가족계획요원이 되어 교육을 다니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아직 두 돌도 되지 않은 막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나다니는 것이었으며 자신은 셋이나 낳은 터수에 남들에게는 하나만 낳으라고 강권을 하는 노릇이니 어찌 보면 딱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평촌댁은 그게 아닌 듯 훗날 나이가 들어서도 가장 기억나는 인생의 한 대목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당시의 부녀회와 가족계획운동을 들곤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선택네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해가 가기 전에 무려 다섯 집에서 그 비싼 텔레비전을 장만했다. 물론 그 중 둘은 막바지로 월남에 갔
시곡마을 부녀회의 단체 관광은 금세 면내의 화제가 되었다. 당장 다녀온 부녀자들이 어찌나 오지게 재미가 있었는지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하긴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을 터였다. 생전 처음 전세 낸 버스를 타고 먹고 마시며 라디오에서나 듣던 신명나는 노래를 온종일 꽝꽝 틀어대니 얼마나 즐거웠을 것인가. 집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 하나로도 부녀자들은 기쁨을 넘어 감격했던 것이다. 그 일로 면내의 다른 마을에도 마을 구판장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시곡마을 부녀회가 관광까지 가게 된 원동력이 구판장 사업이었음을 알고 서둘러 작게라도 가게를 꾸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마을에서는 조금 큰 집의 행랑채를 빌어서 시작했고 아니면 주민들이 손을 모아 아예 작은 건물을 짓기도 했다. 물론 얼마 안 가 구판장의 폐해도 생겨났다
[한국농정신문 안혜연 기자]우리나라에 수입되고 있는 식용 옥수수의 50%, 식용 콩의 75%는 GMO 농산물이다. 그런데 그 많은 GMO 농산물은 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을까. 매일같이 우리는 GMO 농산물을 먹고 있는데 왜 인식하지 못할까.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GMO 농산물이 있을까. 우리 정부의 GMO 농축산물 수입 규정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현재 대부분의 GMO 농산물은 살충·제초 효과가 있는 유전자를 함유하고 있다. 이는 미생물에게서 살충 효과가 있는 유전자를 추출해 숙주(농산물)에 주입하는 식의 방법으로 이뤄진다. 농산물은 자체적으로 살충 성분을 생산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많은 양의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농사가 가능해진다. 과연 이 농산물을 ‘친환경’이라 부를 수 있을까.이 책
여성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종자 지키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2011년 5월부터는 함안군 여성농민 생산자와 함께 언니네텃밭 생산자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요즘 구하기 힘든 고추 종류 중 수비초와 붕어초, 그리고 여성농민회에서 보급한 제비콩, 녹두, 땅콩, 토란 등 가지가지 심고 가꾸고 있다.토종씨앗의 이름은 그 모양새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지역마다 마을마다 같은 씨앗이라 하더라도 이름이 다양하다. 토종 고추는 수비초와 붕어초가 있다. 고추는 모종을 키워 밭에 내기까지가 힘든 일이다. 고추 종자는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고 계신 분에게서 얻어다 심은 것이 7년쯤 되었다. 수비초는 길쭉하고 끝이 뾰족하고 맛이 무척 맵다. 껍질이 얇고 키가 큰 편이다. 붕어초는 꼭 아삭고추 같
국민투표가 있던 그 해에 면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사업은 마을 구판장의 설치였다. 이미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마을마다 부녀회가 결성되어 있었고 부녀회의 사업은 크게 절미운동, 마을공동경작지 운영, 구판장 사업 등이었다. 절미운동은 별 게 아니었다. 밥을 지을 때마다 조금씩 쌀을 떼어서 항아리에 모았다가 돈으로 바꾸어 저축을 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혼식을 독려하여 한 끼에 들어가는 쌀이라야 얼마 되지도 않는 터에 한 숟가락씩 떼어봐야 병아리 오줌만큼이나 될 터인데도 부녀들의 호응은 높았다. 여자들로서는 평생 처음 정부 시책에 따라 당당하게 제 앞으로 쌈짓돈을 만드는 것이었으니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쌀을 팔아 오백 원이 모이면 그 돈을 밑천으로 농협에서 통장을 만들었고 아무리 가난한 시골이라도 마누라가
‘새야 새야 유신새야 푸른 창공 높이 날아 조국통일 이룩하고 자주통일 달성하자/새야 새야 유신새야 너도나도 잘 살자는 유신헌법 고수하여 국력배양 이룩하자/유신유신 우리 유신 우리 살림 오직 유신 유신체제 반대하면 붉은 마수 밀려온다’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에 가사를 바꾼 노래는 들을수록 입에 붙어서 선택은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학교에서도 금세 아이들에게 가르쳐서 아이들이 하교하며 마을이 떠나가게 합창을 하기도 했다. 면 단위, 읍 단위에서 열리는 반공궐기대회며 유신찬성대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다보니 그 해 겨울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투표를 열흘쯤 앞두고 열린 회의에서 선택은 십만 원을 현금으로 받았다. 주민들에게 투표에서 찬성을 유도하며 쓰라는 돈이었다. 그 돈이면 투표권이
올해도 우리 집 앞 은행나무에 은행이 ‘아그대 다그대’ 많이 열렸다. 이 은행나무 한 그루에서 얻은 것으로 양가 형제자매들이 다 나눌 정도로 풍성하게 열린다. 남편과 은행을 씻으며 이 나무가 우리 집에 온 사연을 되새기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20년 전 함께 농사짓던 분께 보증 서줘 옴팍 뒤집어썼는데 그 분이 미안하다며 주고 간 게 이 은행나무다. 우리 부부는 이 은행나무가 수천만 원짜리라고 웃으면서 얘길 하곤 한다.그런데 우리 텃밭엔 이 은행나무보다 더 사연이 깊은 토종씨앗이 한 가지 있다. 구조내기 대파 혹은 구족파라고 한다. 뿌리 번식이 잘 되어 한해에 아홉 갈래 이상 새끼를 잘 친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IMF가 터졌던 해에 이 대파를 수십 마지기 지었는데 값이 폭락하여 갈아엎었다. 우리에게 농
1974년에 선택은 공화당 산동면책이 되었다. 마을마다 활동장들이 있었는데 대개 이장이나 새마을지도자였고 이들은 실제 행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읍이나 면에서 회의가 있으면 공화당 간부들이 함께 참여하여 매사를 결정하는 구조였다. 작은 단위의 당정협의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 해에 서울의 정치권에서는 유신헌법을 바꾸자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야당과 시민사회에서 이년 넘게 지속된 유신체제를 정상적인 체제로 되돌리자는 주장을 펼치자 시골에서도 그에 대해 말이 나오곤 했다. 많지는 않아도 유신을 반대하는 야당 성향의 인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면소재지에 있는 천주교 공소에 다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농민회를 만들었는데 그들이 주로 반정부적인 주민이었다. 선택의 집에서는 작은 어머니가 공소에 다니고 있었다. 무
쌀 소비량이 극감했다. 1인당 쌀 소비량은 1980년 132kg에서 2014년 65kg로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쌀의 지위는 하염없이 떨어졌다. 가을 추수기를 맞은 농민들 표정이 어둡다. 풍년 농사로 쌀값이 대폭 하락했기 때문이다.게다가 언론에서는 탄수화물이 마치 우리 몸에 독 인양 떠들어 대고 있다.이래저래 쌀은 처량하고 심란한 처지에 있다. 따라서 농민들의 삶도 편치 못하다.이러한 때에 식품영양학자 정희경 교수의 「밥의 인문학」은 밥심으로 일하고 밥값 하면서 살아온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일생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1998년 충북 청원군 소로리 구석기 유적지에서 오래된 볍씨가 발견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볍씨가 세계 최초의 볍씨로 판명 났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쌀농사
지붕개량사업을 기점으로 선택은 마을에서 단순한 새마을운동의 지도자 이상이 되었다. 호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마을 전체가 한꺼번에 지붕을 바꾸는 일은 단순한 독려로 될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돈이 문제였다. 단돈 몇 만원이라도 돈을 여축해두는 집은 거의 없었고 지붕을 개량하려면 정부에서 융자로 지원해주는 돈 외에 자기 돈을 얼마간이라도 융통해야 했는데 그 마저 어려운 집이 여럿이었다. 선택은 그런 집에 자신이 무이자에 가까운 돈을 빌려주어 결국 그 해에 온 동네의 지붕을 몽땅 슬레이트로 바꾸어 놓았다. 거의 전쟁처럼 진행된 일이었다. 주민들을 동원하여 울력하듯이 한꺼번에 두세 집씩 공사를 해서 불과 몇 달 만에 일을 마치자 또 한 번 시곡마을은 지붕개량 선도마을로 포상금을 받았다. 선택의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났지만 농촌은 제게 식물도감 이미지로만 있었습니다. 농촌에 살게 되리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는데 어린 아들의 사고와 농사짓고 싶다는 남편 덕에 농촌에 내려왔습니다. 한 3년 울고 나니 농촌이 달리 보이더군요. 농촌이 생명을 키우는 곳이라 치유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삶을 되새김질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농촌이구나 싶었습니다.1997년 농촌에 내려와 18년째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처음 내려왔을 땐 남편이 농사를 전혀 몰라 친정에서 1년 동안 농사를 배웠습니다. 그 즈음 광주에 사시는 선배님이 안완식 박사님의 등 농촌에 사는 데 길잡이가 되는 좋은 책들을 몇 권 두고 가셨습니다. 책 속의 방법으로 몇 년 동안 심어
무언가 입을 떼어 우물거리기는 했지만 급하게 밀려가야 했으므로 대통령의 눈은 다음 사람에게 향했다. 똑똑하게 대답을 하지 못한 멍청함을 선택은 평생토록 자책하며 살았다. 대통령이 돌아가고 그 날 저녁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밥상이 차려졌다. 불고기에 소고기국이 올라왔고 처음으로 본 노랗고 긴 과일이 소쿠리 째 놓여졌다. 식사 전에 원장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했다.“오늘 여러분이 다 보셨듯이 대통령 각하가 우리 연수원에 다녀가셨습니다. 저도 그 분이 가끔 미행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대통령 각하가 여러분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가시기 전에 저에게 불편한 것은 없는지, 난방은 잘 되는지, 교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