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라고 농민들의 주체의지를 강조하는 박진도 충남발전연구원 원장. 동시에 ‘내발적 발전’을 강조하는 박 원장은 “농업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는 한 현재 농업·농촌·농민의 위기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화 문제에 대응하는 것은 지역화 밖에 없다”라고 밝힌 박 원장을 지난 18일 공주시에 위치한 충남발전연구원에서 만나 농업과 농촌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도숙=한국농업이 위기라고 이야기 합니다. 현장에서 첫 번째로 느끼는 것이 ‘격차’입니다. 부자 농민과 가난한 농민의 격차가 눈에 보입니다. 또한 농촌 인구의 고령화와 경지면적의 축소가 눈에 보이는 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생산물에 대한 가격보장
텔레비전이고 신문이고 온통 대통령 선거 이야기들이다. 선거라는 게 묘한 것이어서 평소에는 아무 관심도 없던 장삼이사까지 게거품을 물고 핏대를 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민주국가에 사는 백성이라면 마땅히 정견이 있어야 하고 정견이 다른 자를 만나면 역시 마땅히 싸워야 하는 줄로 아는 것 같다. 지난 총선 무렵엔 술자리에서 서로 지지하는 정당 편을 들어 말다툼을 하다가 살인사건으로 비화한 일도 있었다. 지난 민주정부 기간에 백성들의 정치적인 관심이 시나브로 줄어드는 것 같더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정치에 대한 관심이 퍽 늘어난 게 느껴진다. 신문을 보니 아직 대선이 여러 날 남았는데도 이미 지지할 후보를 정한 유권자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물론 그 동안 우리나라 선거판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
경남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 이 마을은 우리 농민운동사에 특별하게 기록된 곳이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가장 크게 농민들이 일어났던 80년대 소몰이 투쟁에서 그 첫 번째 싸움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88년의 추곡수매거부운동이 일어난 곳 역시 두호마을이다. 80여 가구, 성산 이 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우리밀살리기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은 들어서면서부터 강한 인상이었다. 마을 입구에 작은 동산이 있는데 수백 그루의 소나무와 팽나무, 느티나무 등이 들어서 있었다. 숲의 이름은 민주동산이다. 시골 마을의 동산에 ‘민주’라는 이름을 단 곳을 과문한 나는 처음 보았다. 옛 농협 창고의 담벼락에는 각종 구호가 쓰여 있었다. 아마 농활을 왔던 대학생들이 써 놓은 듯, ‘통일
지난 9월 22일에 열린 서울여성문화축제에 횡성군 여성농민회 회원들이 떴다! 서울 도심 한 복판에서 횡성 여성농민들과 서울여성회 언니네텃밭 회원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매번 횡성에서 밭둑에서 만나던 우리가 서울 도심 공원에서 만나니 기분이 정말 색달랐다. 헤어져 있던 언니를 만나듯이, 명절날 어긋나 서로 얼굴 보기 힘들었던 친정 언니와 동생이 만나듯이 환호성이 터졌고, 서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얼싸안았다. 서울에 사는 여성들이 준비한 축제의 자리에서 오랜만에 가을나들이를 온 횡성 언니들은 마음껏 축제를 즐겼다. 서울여성회가 준비한 이번 서울여성문화축제의 주제는 ‘가족’. 다양한 가족을 인정하고 가족내의 평등문화를 만들어야 하며, 가족을 구성하고 선택할 권리가 모두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내용의 축제가 여성농
옛날 뒤를 보고 밑씻개가 없을 때 무엇으로 해결했을까. 풀잎이 많이 나는 계절엔 쑥이라든가 칡잎 등이 유효하게 쓰였을 것이다. 겨울에는 짚이나 마른 건초들을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는 있다. 주로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곳에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즉 절간의 해우소(解愚所)에는 풀잎이나 볏짚 따위로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여 해우소 한쪽에다 새끼줄을 걸어두고 거기에 비벼 밑을 씻었단다. 그래서 다음 사람이 쓸 때 막대기로 떨어내고 쓰는데 이때 똥을 털어낸 막대기 이름이 ‘똥친 막대기’다. 그만큼 별 볼일 없고 하찮은 물건을 일러 ‘똥친 막대기’라고 한다. 대통령후보들이 선거운동으로 동분서주하는 모습이다. 연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고 있을 뿐 이렇다 할 공약
꼭 15년을 탄 트럭이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햇수에 비해 달린 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험한 일을 주로 해서인지 마지막 두어 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버텨주었다. 트럭을 바꿀 요량으로 두어 달 전에 차 가게(그 곳을 왜 딜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에 들렀더니 무려 두 달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불경기라고 난리인데 웬 수요가 그리 많은가 했더니, 작은 트럭은 불경기에 오히려 많이 팔린단다. 마땅히 할 게 없는 사람들이 생계수단으로 장만한다는 거였다. 어쨌든 낡은 트럭은 두 달을 더 고장 없이 가까스로 견뎌주었다. 우리 집에는 두 대의 차가 있다. 돌아보니 차를 두 대씩이나 굴린 세월이 짧지 않다. 17년 전 처음 귀농했을 때 중고 지프를 장만했다. 아직 둘째, 셋째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라 지
의성군농민회 금춘지회(금성면, 춘산면, 가음면 연합지회)에서는 지난 2월 26일부터 지금까지 214일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한미FTA 폐기와 한중FTA 중단을 바라는 백배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매 장날마다 오전 9시 30분부터 약 40분간 회원들이 상복을 입고 한미FTA 폐기와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농업정책을 바로잡기를 바라는 내용의 성원문을 낭독하며 절을 백번 올리는 방식이다. 상복을 입고 절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로부터 눈총도 많이 받았다. 시골 정서상 상복을 입고 절을 한다는 것은 상갓집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한미FTA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던 농민들에게 쉽게 내용을 풀어 이야기 하듯 진행하는 방
달은 이미 신비의 베일을 벗어 던진지 오래 되었다. 1967년 미국이 쏘아올린 아폴로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했다. 이로써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으로 기록된다. 달은 수많은 분화구를 가진 곰보딱지 화강암덩어리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난 뒤로 달빛은 빛의 반사작용으로 내게 도달하는 햇빛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아득한 꿈결너머로 내 발등에 떨어지는 달빛은 내가 직접 몸 닿아있는 전설이었다. 할머니의 옥토끼 이야기나 월궁항아의 이야기도 계수나무도 꿈을 먹고 사는 나약한 인간 세상에 따듯한 위안이었다. 한가위는 농경민족이 추수를 하기 바로 직전이라서 만물이 추수를 기다리는 시기다. 모든 것이 풍요롭다. 그래서 보름달을 보며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곤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농
올해 농사가 끝났다. 아직 들깨와 콩이 남았고 땅콩도 캐야 하지만 모두 자투리땅에 조금씩 심은 것들이라 그다지 품이 드는 일은 아니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사과가 모두 시장으로 나감으로써 고단했던 지난 두어 달의 수확을 마감한 것이었다. 7월 말부터 시작된 복숭아 출하를 시작으로 거의 두 달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폭염에 이어 늦장마가 길었고 태풍까지 불어 닥쳐 실로 악전고투의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귀농 17년 동안에 올해 가장 많은 매출이 올랐다. 그래봤자 하급 공무원 일 년 연봉 정도이니 네 식구가 매달린 결과치곤 초라하기만 하다. 지난 오년간 농가의 수입은 오히려 떨어졌다고 하는데,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실로 암담한 세월이다. 마지막으로 사과를 출하한 날, 아내와 나는 자축하는 의미로
글을 쓰기 전에 먼저 도움을 얻고자 이전에 쓰여진 글 몇 편을 읽어보게 되었다. 글을 읽다가 강흥순님의 ‘다시 서는 땅’의 첫 부분부터 막혀 눈물이 핑 돌았다. “농촌에서 온 편지는 누구에게 보내야 할까? 이 편지는 또한 몇 명이나 끝까지 훑어볼까? 땀과 피와 뼛국으로 범벅이 되었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 농촌의 편지를. 왜 쓰는지도 모르면서 써대는 하잘 것 없는 농촌에서 온 이 편지.”라고 시작하는 글을 보고는 이 분이 글을 쓸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 편히 있는 내 모습에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절대 하잘 것 없는 편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와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태어났고, 또 도시에서 지금까지 살다보니 도시를 떠난다는 생각조차
경자유전의 원칙은 오래된 유가의 치세원리로 ‘정전제(井田制)’로 확립 됐다. 맹자도 군주가 백성의 경제활동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하느냐가 치세의 근본이라고 했다. 정조대왕은 자신의 시대를 병든자가 치료를 하지 못하여 병이 극도로 악화된 총체적 위기의 시대로 인식 했다. 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정책으로 ‘민산(民散)’을 꼽았는데 이것이 요즘 말하는 ‘민생경제’인 것이다. 농업이 중심산업이었던 시대 백성이 농사를 짓도록 하고 그 생산의 근본인 토지를 소유하게 하는 경자유전의 개념을 통해 ‘정전제’를 실시하려 한 것이다. 정조의 정책은 봉건제하에서 시행되기 어려운 제도였다. 당연히 봉건적 지주들로 이루어진 관료 집단의 저항을 넘기란 곧 죽음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정조의 죽음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1
농업계의 호적계장이라고 자평하는 황민영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상임대표. 황 상임대표는 대통령직속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농민단체와 정부 사이에서 농업·농촌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농특위가 없어진 것을 두고 강하게 비판하는 그는 “농촌이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사장과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 상임대표를 맡아 농업과 농촌, 그리고 식문화 교육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도숙=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또 다른 일을 하고 계시죠? 황민영=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농어연) 이사장 일을 맡고 있어요. 농어연이 어려운 시기이지만, 피할 수 없으면 맡아서 즐기는 거죠(웃음)
사과 포장재를 살 일이 있어 아침 일찍 농협에 들렀다가 직원이 권하는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되었다. 워낙 바쁜 요즘이라 후딱 마시고 일어서야 마땅한데, 몇몇 알만한 얼굴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기에 잠시 귀를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탄과 실망이 뒤섞인 이야기의 내용은 사과 값에 대한 것이었다. 추석을 코앞에 둔 요즘 작년의 절반 정도의 경매가가 나오고 있다. 내가 사는 면은 특히 사과 과수원이 많아 사과 가격에 따라 일 년 수입이 결정되다시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격이 폭락하니 농민들의 시름이 깊을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올해 사과 가격이 폭락한 이유를 찾지 못해 의아하던 참이었다. 농협에 모인 이들이 진단한 이유는 다양하였다. 실제로 그런 이유에선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핏대를 올려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무안의 이정옥 선생은 전국적인 유명인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맛보고 감탄한 ‘행복한 고구마’의 대표로, 유기농업의 선도주자로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안다. 지금은 고구마로 수십 억의 매출을 올리는 성공한 농업인이기도 하다. 무안 바닷가의 황토집을 방문한 날에도 선생은 고구마를 출하하느라 몹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일머리를 잡아 일꾼들을 지휘(?)하는 솜씨가 가히 예술이었다. 언뜻,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깊고 따뜻한 눈매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선생이 단단하고 옹골찬 내면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눈이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야무지게 해낼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초대 회장을 맡을 수 있었던
농촌에서 온 편지는 누구에게 보내야 할까? 이 편지는 또한 몇 명이나 끝까지 훑어볼까? 투자대비 수익이 전무하다 못해 노상 까지고 마는 농촌에서 온 편지를. 젊은이는 사라진 채 최고령의 팥죽냄새가 폴폴나는 이 편지를. 오래전 정부가 버리고 재벌이 누르고, 가위 눌려서 제풀에 울어대는 눈물로 쓴 편지를. 땀과 피와 뼛국으로 범벅이 되었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 농촌의 편지를. 왜 쓰는지도 모르면서 써대는 하잘 것 없는 농촌에서 온 이 편지. 칠년의 가뭄 끝에 장마가 있듯이 절망의 끝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천대를 받는다 해도, 먹어야 사는 것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많은 시간을 힘들게 지냈고, 그 많은 아픔을 숙명처럼 떠안았으며, 그 많은 죽음들을 서럽게 보내드렸다. 허깨비 같은
어려운 이야기지만 오늘 역사를 화두로 끄집어 낸 데는 나름 요즘의 역사논쟁이 가방끈 짧은 필자에게도 불편하게 다가온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한 것은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0년은 했을 터다. 그러나 필자의 역사공부는 시험문제의 답을 네 가지 중 한 가지 고르는 일에 집중한 때문인지 단편적인 객관 사실에 머무르고 말았다. 역사를 배우는 자세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배우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이 언제 일어나고 누가 주도하고 어떻게 전개되고 어디서 종결이 됐는가를 배운다면 ‘역사적 사실’을 배운 것이고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려 한다면 ‘역사적 사실을 통해’배우는 것이 될 것이다.
올해 농사일이 시작되면서 적잖은 걱정 하나가 있었다. 지난 겨울 무렵부터 왼쪽 어깨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치지도 않았는데 조금씩 아픈가싶더니 옆으로 쳐들거나 뻗으면 대단한 통증이 오고 심지어 세수를 하거나 운전대를 돌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오십견이라는 증상인 듯했다. 병원에서는 어깨 관절을 감싸고 있는 조직이 닳아 생긴 병이라고 하면서 무슨 주사약을 어깨 근처 여러 곳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실 원인에 대해서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농사를 짓고 글을 쓰는 직업상 쉽게 어깨에 무리가 온 것 같다는, 아내가 짐작한 내용이 의사가 진단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일정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양의 대신 한의원을 찾아 침을 맞기 시작했다. 거의 한 달 동안 꾸
“건강한 정신이 깃든 농민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농민문화로 확산됐으면 좋겠어요” 한국사회 산업화 과정의 아픔과 1980년대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을 온 몸으로 겪어온 이기연 씨. 그는 노동자 문화운동을 통해 현장과 노동자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민중미술’에서 답을 찾고 활동했다. 이후 ‘우리옷’의 우수성과 철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우리옷 브랜드인 ‘질경이’를 설립해 우리옷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옷은 살림의 문화, 농민복은 농민문화 전달통로 가능 한도숙=어려운 삶을 살아오셨지요. 풍문여고를 졸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 지인 몇 분도 이 사장님을 알고 있더군요. 학창시절에 유명했나보죠. 이기연=그림을 유별나게 그렸었
늘 그렇듯 두 계절을 지나 한 계절이 바뀌는 가을의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그 어느 해 보다도 뜨거웠던 여름. 우리들의 낮과 밤을 점령했던 무더위와 열대야를 두 녀석이 보쌈 해 가버렸네요. 볼라벤과 덴빈의 심술 덕에 남부지방은 몇 십 년 된 소나무가 뽑히고, 운행 중이던 차량이 물에 잠기고, 등교생이 부상을 입고, 농가에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태풍 온다고 유리창에 신문지와 테이프를 붙인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서울은 조용히 지나갔지만요. 누군가는 좁디좁은 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나 먼 나라 이야기 같은걸 보면 우리나라도 참 넓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넓어서 아직 내나라 땅 구석구석도 밟아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자전거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일주하는 게 작
오늘 대한민국의 농촌은 병들어 있다고 한다. 그곳은 더 이상 뭇사람들의 고향이 아니며 도시민들의 비애와 분노를 누그리고 인간성을 회복시키기에 마땅한 곳이 아니다. 그곳도 도시와 못지않은 경쟁의 소용돌이와 자본의 예리한 칼끝이 이미 깊숙이 들어와 버린 처절한 생존의 현장이다. 여차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훌쩍 떠나야할 패배자들과 탈락자들이 끙끙 신음을 내며 농촌의 끝자락에 매달린 곳이다. 도연명(陶淵明)은 쌀 닷 말에 자신의 인격을 팔고 싶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며 ‘귀거래사’라는 시를 썼다. 물론 예전의 법도대로 한다면 현직에 있을 때만 서울에 있고 벼슬을 놓으면 시골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돌아가시기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내놓고 고향인 봉하로 내려가 농사를 지은 것이 그런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