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윤석원의 농사일기] 강원도 양양 물치항과 물치해변이 직선거리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멀리 바다가 보인다. 바람 많은 이곳 동해안이지만 뒤로는 나지막한 야산이 북서쪽을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따사로운 햇살이 하루 종일 드는 양지 바른 곳, 100여 미터 아랫동네는 150여 가구가 2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대부분 농민인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고 있는 물치리와 강선리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그곳이 바로 농부로 살아 보려하는 나의 작은 일터이자 후반부 삶의 보금자리이다. 아직은 작은 창고와 햇빛가리개가 전부이지만…. 지난해 작은 농지를 구입하고 친환경 유기농업을 목표로 토양개선을 위해 석회고토도 뿌려주고 호밀도 식재하여 땅심을 높이는 작업을 해왔다. 올해
그랬다.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전날 뉴스는 온통 당진의 삽교천 준공식이 화제였다. 바다를 막아 무려 오천 정보의 논이 새로 생겼다는 소식에 선택도 적잖이 흥분했었다. 그런 공사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 대통령 한 사람뿐일 거라고, 과연 하면 된다는 새마을 정신은 위대하다고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친 소식이란! “형님, 일어나셨어요? 얼른 텔레비전 켜 봐유.” 새벽에 꾼 꿈으로 잠이 달아나 뒤척이고 있을 때 요란스레 전화가 울렸다. 아직 날도 새지 않은 시간에 전화가 오는 일은 드문 일이었기에 약간 불안한 마음이 스쳐갔던 것 같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읍내에 사는 당 사무국장이었다. 성격이 살가워 몇 차례 술자리
돌이켜 보아도 이상하게 그 해에는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학교에서 내내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던 큰 아들이 읍내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어 하숙을 들여 주었고 마을에는 천호중이가 어깨가 처져 돌아온 것 말고 네 집이나 또 서울로 떴다. 젊은이들이 남아나지 않아서 전에는 뒷짐 지고 물꼬나 보러 다녔을 오십 줄에 든 늙은이들까지 논에 들어가 모를 심었다. 나라는 온통 석유 값이 올라서 비상이었다. 경제가 위험하다고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번호판을 떼어서 관청에 반납하는 일이 줄을 잇기도 했다. 선택도 그 해 처음으로 장만한 포니 자동차를 남들 눈이 무서워 집에 세워두기만 했던 해였다. 여름에 두 번이나 몰아쳤던 태풍도 대단했다. 두 번째로 8월 하순에 온 태풍은 엄청
선택 일생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해, 1979년 기미년 새해가 밝았다. 선택은 새해 첫날을 변소에 들락거리며 종일 누워있다시피 했다. 전전날 종무식을 하고 직원들과 술을 마신 데다 전날인 일요일에도 술자리가 생겨 그다지 즐기지 않는 술을 이틀 연속 마신 끝에 탈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꿀물과 동치미를 번갈아 마셔가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매 시간 대통령이 발표한 신년사와 휘호가 화면에 나타났다. 올해 대통령이 한자로 쓴 휘호는 ‘총화전진’이었다. ‘하, 글씨 한 번 매섭다. 저런 박력이 있으니까 위대한 대통령이 되는 거지.’ 선택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 밑에서 붓을 좀 잡아보았기 때문에 글씨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대통령의 글씨는 그야말로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글씨였다. 청와대에서 신년을 맞아 찍은
“야, 임마. 이 정권이 농민을 위한다고? 너야말로 정신 차려라. 그깟 조합장 자리도 권력이라고. 박정희가 늬 애비나 되냐?” 지랄 같은 성격의 석종도 누가 들을까 무서운 소리를 내뱉곤 했다. 아무래도 큰일이 나지 싶었는데 석종은 그 해에 가까운 원주에서 경찰에 잡혀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가톨릭 농민회에서 하는 집회에 참가했다가 그리됐다고 했다. 하여튼 석종을 따르는 몇몇이 농협에 와서 시비를 거는 정도 외에는 별 탈이 없이 잘 굴러가는 농협이었다. 모내기가 다 끝나고 농촌에도 별 다른 일이 없어 개울로 천렵을 다니던 7월 초순이었다. 그 동안 뜸했던 정해수가 갑자기 선택을 찾아왔다. “아이고, 우리 아재가 조합장이 되었다면서? 그러면 나한테 연락을 해야지, 섭섭하게.” 예
며칠 후에 선택은 만 원짜리로 백 장을 넣어 지구당 사무장에게 건넸다. 박의원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올 때 사무장이 다가와 넌지시 한 마디 했던 것이다. “우리 의원님이 워낙 청렴하셔서 선거 돌아올 때마다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이번에 부위원장님이 조금 성의 표시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당연히 나중에 돌려드립지요.”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럼 얼마나?” “정해진 거야 있겠습니까? 부위원장님들은 보통 한 장씩 하십니다만.”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돌아오면서 그 정도면 썩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만 원이면 농촌에서 큰돈이긴 해도 공화당 부위원장 자리 또한 여간한 자리가 아니지 않은가. 나중에 돌려준다는 말 또한 그만한 이권을 주겠다는 것일 테니 일종의 투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같은 나라’를 꿈꾼 이들이 있었다. 인간평등이 실현되고, 사회비리가 척결되며, 외국 침략세력을 내쫓아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를 꿈꾼 이들이 있었다.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깃발을 들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농군들은 이전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뼈 속 깊이 새기며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무참히 스러지고 만다.혼불문학상 다섯 번째 수상작, 이광재 작가의 장편소설 「나라없는 나라」는 오늘날 다시 ‘동학농민혁명’을 불러온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발부터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기까지의 과정을 고전적인 문체로 그려낸 소설에선 1894년 당시 부정부패한 탐관오리로부터 핍박받던 농군과 민초들의 이야기가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혁명
선택의 계산대로 일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서류상으로만 꾸미려던 것이 일단 보리씨를 뿌렸다가 나중에 갈아엎는 걸로 했다. 아예 보리를 심지도 않았다가 들키면 공무원들 목이 달아난다며 완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리를 심은 것까지 공무원에게 확인을 받고 나중에 농민이 자의적으로 갈아엎은 다음 마늘을 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무려면 돈 좀 해보려고 심었다는데 농민을 잡아가두기야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농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보리 종자 값이며 갈아엎는 비용이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햇보리를 구하려 하자 수매가 오천 원에 아무리 싸게 주어도 천오백 원은 얹어 주어야 살 수가 있었다. 이래저래 손해가 많았지만 역시 마늘 값이 좋아서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그래도 정부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수백리가 고향이다. 1980년, 바로 개울건너 내지리로 시집을 왔고, 1982년부터 농사를 짓고 있다. 그 동안 안 지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이것 저것 많은 농사를 지었다. 채종 농사를 시작한 것은 2007년에 이르러서이다. 2007년 배추 씨앗을 받기로 하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지는 바람에 고생을 해 여느 해보다 기억에 많이 남는 해이다. 아픈 남편과 함께 배추씨를 터는데 들깨 씨를 털 때처럼 약간 눅눅한 상태에서 털어야 되는 줄 알고 눅눅해진 배추 줄기를 도리깨로 터느라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2008년 제주도에서 토종씨앗 실태조사를 통해 찾아낸 구억배추를 토종씨드림에서 분양받아 키워냈다. 제주에서 온 구억배추 씨앗을 여성농민회 회원들도 가지고 갔지만
세월이 가면서 농사짓는 풍속도 변해갔다. 전에는 조금씩 심어서 양념이나 하던 고추와 마늘을 심는 농가가 늘어갔다. 농민들이 어수룩해보여도 눈치가 빠르고 돈 되는 곳에 몰려드는 것은 도시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특히 마늘 값이 좋고 지역의 토양과도 맞아서 가을에 나락을 베고 나서 논에 마늘을 심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곡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올해는 보리 말고 마늘을 심어 볼라네.”농사를 도맡아 하는 삼촌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선택도 흔연히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보리에 비해 들어가는 밑천이 많고 일도 더 많지만 그런 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선뜻 마늘 농사를 시작하지 못하는 농가는 대개 씨 마늘 값이 부담되어서였다. 마늘은 농작물 중에 씨앗 대비해서 가장 소출이 안 나는 작물이다. 콩이
그 무렵 선택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60호가 넘던 마을의 가구 중에 두어 해 사이에 무려 여덟 집이나 마을을 떠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면내의 어느 마을이나 비슷한 정도로 고향을 뜨는 사람들이 생겨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이들이 중학교 졸업만 하면 서울로 가는 바람에 점점 마을에는 젊은이들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런데 선택이 수족처럼 부리던 천호중이가 어느 날 술 한 병을 차고 와서 고향을 뜨겠다고 할 때는 놀랍기 그지없었다.“난 이제 더 못 버티겠다. 서울로 뜨기로 했어.”나이가 한 살 많은 호중과는 진즉부터 너나들이를 하고 있었다.“아니 왜? 서울서 누가 오래?”물어보나 마나 호중이 서울에 별다른 연고가 있을 리 없었다.“몰라서 묻
‘제비깨’를 심고 가꾼다는 엄남이(77)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임실치즈마을을 찾았다. 엄 할머니는 여성농업인센터에서 왔을 때 자신은 시어머니가 농사짓던 참깨를 받아서 지금까지 심고 있는데, 그것이 다 토종이라고 밝혔다. 일명 ‘제비깨’다.“왜냐면, 보통 하던 것인 게 그냥 그 놈 또 종자 받아서 쓰고 그랬지요. 우리들은 옛날 그놈을 써 먹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깨들은 막 조박조박허니 조박깨고 많이는 난갑드만. 요새 것은 늦되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올되니까. 이것 해내고 무도 심고 허니까. 아직까지 밑 안지고(없애지 않고) 여태 가지고 있는 것이제. 시어머니가 허든 걸 내내야 내가 되물렸제.”기름을 짜면 그 양은 요즘 깨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궁금했다.“많이 나오죠. 깟(겉외)이 얇아요 깟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