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홍기원 기자]“다들 좋아한다. 입이 귀에 걸렸다.”농민에게서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대답이다. 전남 강진군은 올해부터 군내 모든 농가에게 70만원 상당의 논·밭 경영안정자금을 지급했다. 장귀영 강진군농민회 사무국장은 “군내 농가 수가 7,100여개 남짓인데 모든 농가에 균등하게 지급됐다”면서 “일상에서 효과가 느껴진다”고 전했다.강진군은 총 50억원의 논·밭 경영안정자금 예산 중 절반을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지급했다. 어떤 농민은 모를 심고 식당에 가서 상품권을 쓰고 어떤 농민은 상품권을 받지 않는 매장에도 상품권을 냈다고
한도숙 전국농민회총연맹 고문양극화·고령화된 농촌사회를 유지하려면 농민수당은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 일각에서는 농가당 월 20만원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터무니없이 적다. 보조금 사업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종자돈이 되겠으나 이 사업을 통해 농민에게 돌아오는 몫은 예산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70%는 사업자들이 가져가는 새는 돈이 되고 있다. 보조금만 활용해도 농민수당은 충분히 도입할 수 있다. 김태수 봉화군농민회 사무국장경제논리나 산업논리로 보면 농민수당이라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
공익적 가치 창출하는 농민에 대한 보상농민수당은 기본소득의 개념이 아닌 사회적 보상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현재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내용은 헌법개정안에도 포함돼있으나 그 가치를 생산하는 농민에 대한 고민은 없다. 농민의 삶의 방식에 따라 농업의 공익적 가치는 증진할 수도 후퇴할 수도 있다. 토지에 비료를 덜 사용해 친환경 영농을 한다면 생태·환경적 가치가 증대할 것이고 반대로 생산성만 높이려 한다면 그 가치는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아무 조건이 없는 보전의 형태가 아닌, 농민 삶의 방식에 따라 가치가 창출되는 것에 대한 보상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전봉준 장군 동상이 마침내 서울 종로에서 역사적인 제막식을 치렀지만 기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엔 적지않은 동상과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대표적인 기념물들조차 저마다 다소간의 결점을 남기며 보는 이의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곳곳에 산재돼 있는 전봉준 장군 동상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것은 역시 정읍 황토현전적지의 동상이다. 두루마기를 입은 전봉준 장군이 주먹을 치켜들고 다른 한 손에 격문을 든, 바로 부안 백산 봉기 당시의 모습으로 보인다.그런데 문제는 전봉준 장군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비록 일부 기념물에서 아쉬운 부분들이 드러나 있지만 동학농민혁명을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의기는 뜨겁다.군사독재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우금치 위령탑이지만 위령탑 뒤로 고개를 올라가 보면 시민단체들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세워 놓은 장승 무리를 볼 수 있다. 시민들은 저마다 의미있는 행사 장소로 빈번하게 이 장소를 찾는다. 위령탑 비문의 ‘박정희’나 ‘대통령’, ‘혁명(5.16)’, ‘유신’ 등의 글자엔 분에 못 이긴 시민들이 훼손시킨 흔적도 역력하다.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우리에겐 자주를 위협하는 외세와 반인권적 봉건지배에 서슴없이 맞서 싸운 아프고도 귀중한 역사가 있다.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어난 민중이야말로 한국사의 진정한 주역’이라는 민중적 접근을 통해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한국사의 대중화라는 큰 공적을 이뤄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과 그 지도자 전봉준의 재평가와 대중화를 위해 뜻 있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 헌신한 끝에 지난달 서울 거리에 전봉준의 동상을 세우기에 이른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그의 ‘역사사랑방’을 찾아 그 과정과 의미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동학농민혁명만큼 우리 역사에서 그 이명이 다양한 사건도 없다. 농민들의 봉기를 침략의 명분으로 삼은 일제는 그들 조선왕조를 전복시키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성을 무시한 채 ‘동학란’으로 폄하했었고, ‘그 용어’에 지나치게 민감한 군부독재시절에는 ‘운동’이라는 단어가 혁명을 대체했다.그 의의와 규모, 주도 세력을 놓고 ‘갑오농민전쟁’, ‘동학혁명’ 등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역사적 사건의 이름은 100주년을 맞았던 지난 1994년에도 그 무엇으로 정해지지 못해 우정사업본부가 기념우표
농업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소농, 농지, 농가부채, 농협 등 농업을 둘러싼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이 시대에 따라 비중을 달리하며 농업문제의 본질로 부각됐다. 그러나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은 각론에 불과해졌다. 수입개방이 농업의 모든 문제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최소시장접근 방식이라는 형식으로 쌀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이미 쌀을 자급하고 있는 마당에 농민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쌀이 수입된 것이다. 초기에는 수입량이 얼마 되지 않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지만 농민들이 느끼는 심리적 충격은 실로 지
박행덕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번에 ‘자유무역과 농업’ 주제로 토론회를 하게 된 건 세계농업이 자유무역으로 인해 점차 황폐화되고 농민이 희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5년 WTO 출범과 함께 주식인 쌀 농업이 붕괴되다시피 했다. 쌀은 우리 농업에서 유일하게 자급하는 품목이다. 그러나 정부는 쌀 수입을 늘리며 농민들에게 작목을 전환하라고 이야기하고, 전환한 타 작물도 연쇄적 가격 폭락 사태를 겪고 있어 농민들은 고통스럽다. 정부는 이젠 쌀 뿐 아니라 과일, 채소 등 모든 농산물을 수입해 가격 폭락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배정은·강선일 기자] 정책 논의과정에서 소외되는 농민들오늘날 아프리카 모든 곳에선 자유무역이 하나의 원칙이 됐다. 자유무역이 한 나라에 들어가면 농민들은 항상 희생자가 된다.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서 지난달 17~21일 회의를 가졌다. 여기선 아프리카 자유무역지대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이날 합의된 내용인 ‘대륙 내 자유무역지역 합의(ZLEC)’에 아프리카 44개 국가만이 서명했고 나머지 11개 국가는 서명하지 않았다. 11개국은 노동자의 자유이동 건에 대해서만 합의했다. 합의서 내용이 이행될 시 2
[한국농정신문 배정은·강선일 기자]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 일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체로 조용했다. 그때 한 농민이 토론회장에 앉아있던 세계 각국 농민들 옆을 지나며 “하이, 에브리원!” 하고 호남 억양이 물씬한 영어 인사를 건넨다. 일순 정적이 깨졌다. 세계 농민들은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하이”, “땡큐” 인사를 했다. 한반도와 세계의 농민은 그렇게 만났다.세계 농민들이 여의도에 모였다. 언어도, 피부색도, 종교도 다 제각각이다. 그러나 ‘자유무역’이라는 괴물로 인해 고통 받는다는 점, 자유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세계 각국의 농민들은 자유무역으로 고통 받고 있다. 희망을 세계화하고 투쟁을 세계화하자는 구호처럼 전 세계 농민들이 단결해 자유무역으로부터 농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주길 바란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환경노동위원장자유무역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분야가 농업이다. 세계화에 비춰 자유무역은 불가피하지만 농업이나 중소기업 등 취약분야에 대해 정부가 지속적으로 관심 갖고 노력하겠다.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정부는 국가경제의 발전을 위해 농업분야의 희생만을 강요해왔다. 전 세계에
핵심은 WTO 농업협정 폐기사실 자유무역이라는 건 강자 보호무역이다. 자유롭게 같은 운동장에서 싸우자는 것인데, 철저히 강대국 보호주의 논리다. 글로벌 경제에서 자유무역의 근거 논리는 파산된 지 오래다. 오히려 FTA 비적용 품목의 수출은 꽤 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자유무역을 통해 손해를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처럼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자유무역 대연정이 전 세계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특히 한국은 수출 만능주의가 지배담론으로 공고히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낡은 녹음기처럼 수출만이 살 길이라 되뇌고 있는
[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016년 기준 50.9%다. 1970년대만 해도 80% 가까웠지만 이후 농산물 수입개방 정책에 떠밀려 곤두박질쳤다. 이런 가운데 지난 2월 정부에선 2022년 식량자급률 목표치를 60%에서 55%로 하향 조정했다. 농민들의 한탄이 쏟아진 이유다.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식량자급률이 90%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식량사정이 어렵다고 알려진 북한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더군다나 앞으로 북한의 식량사정이 더 좋아질 수도 있다며 낙관적 전망을
[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오는 27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과 5월로 전망되는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전환이 이뤄질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농업 역할론’이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식량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민간 차원의 교류가 자연스럽고, 남북간 상호신뢰를 회복하는 단초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이런 이유로 문재인정부의 남북농업교류 계획에 눈길이 쏠리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검토단계라는 입장만을 밝혔다. 대북제재로 인해 극히 제한적이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어 지켜보고 있으며, 구체적인 계획을 확인하려면 주무부처인 통일부에 직접 문의해야 할 것 같다는 게 농식품부 관계자의 설명이다.일단 전문가들은 정부가 대북제재 이전 합의된 수준에서
[박행덕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강원도 평창 통일문화제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 동지들의 헌신과 자신감이 일궈낸 값진 성과였다. 북측 응원단과 함께 통일문화제를 성사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성사시켰다. 목이 쉬어라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는 젊은 활동가들, 눈물을 보이는 노 투사의 모습을 보며 정말 통일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통일문화제 행사 때 전농이 걸었던, 뜬구름 같고 신기루 같던 ‘남북정상회담 성사’가 현실이 됐다. 곧이어 북미정상회담도 열린다. 2월 이후 지금
[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과 불안이 완화되며 훈풍까지 불어오는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선 남북교류와 통일농업에 있어 지속가능성을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는 데 무게가 쏠리고 있다.홍상영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지난 2010년 5.24 조치로 남북교류가 전면 중단된 후 남과 북 양측 모두에게 의식 변화가 존재한다”라고 운을 떼며 “과거 식량을 주고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는 식의 남북회담과 교류는 협력 방식 중 하나지만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남한의 경우 북에 쌀을 보내도 미사일이
[한국농정신문 홍기원 기자]지난 남북공동영농사업을 돌아보면 협동농장 단위 협력사업의 성과가 주목된다. 앞으로 민간의 협력 경험과 정부의 대범한 지원이 어우러지면 한층 진일보된 남북공동영농사업을 펼칠 수 있다는 기대가 높다.1990년대까지 식량지원에 국한됐던 민간단체들의 대북사업은 2000년 들어 다양한 분야의 협력사업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1998년 북측과 자매결연 방식으로 10개군 농업 지원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뒤 다음해인 1999년엔 젖염소 보내기 사업을 추진했다.본격적인 공동영농사업은 2001년 5개 협동농장에서 진행된 농업기술협력사업이다. 그 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지방자치단체의 협력을 받으면서 공동영농사업은 협동농장 현대화 사업으로 발전했다. 경기도가 함께
[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남북관계가 파탄 났던 시기에도 전국의 농민들은 남북농민교류 재개를 위한 사업을 지속했다. 그 주된 매개체는 쌀이었다. 이제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해빙되는 시점에서, 농민들은 다시금 통일쌀을 북측에 보내기 위해 준비 중이다.전국농민회총연맹은 남북 농민의 통일농업 실현을 위한 사업으로서 2002년부터 ‘통일쌀보내기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남측의 만성적인 쌀값 폭락 문제 해결 및 북측에 대한 식량지원을 통한 민족농업 실현을 목적으로 삼았다. 2002~2008년 동안 끊임없이 진행된 통일쌀보내기사업의 결과, 2008년엔 전국 53개 시·군 12만6,100평 면적의 경작지에서 통일쌀 재배가 이뤄졌다.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농민들의 대북 쌀지원 노력마저 가로막
[한국농정신문 배정은 기자·사진 한승호 기자]남과 북의 농민대표가 함께한 마지막 식사가 벌써 10년 전 일이 됐다. 12번의 금강산과 5번의 평양,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남과 북의 농민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희망을 이야기했던 때를 문경식 전 전농 의장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전농이 남북농민교류에 나서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2000년 10월이었다. 북에 큰 행사가 있다며 남측 사회단체 대표들을 초청하면서 비행기를 보내줬다. 내가 낙농을 하고 있을 때라 직접 가지는 못했는데 행사에 참석했던 남과 북의 농민대표들이 서로의 농업현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당시 북의 농민들은 냉해와 서리피해로 어려운 시기였고 농자재도 부족할 때라 전농이 못자리용 비닐보내기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