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학교에서 배부하여 아이들 등교 전에 검사하는 코로나 자가진단키트를 보면 임신 테스트기로 선명한 두 줄을 확인했을 때가 자연히 떠오른다. 뱃속에 새사람을 기다리던 차에 임신을 확인한 순간 엄마가 된다는 기쁨만큼이나 크게 느꼈던 것은 걱정과 불안이었다. 만일 농번기에 출산이 겹치면 경제적으로도 타격이 심할뿐더러 그야말로 산후조리 기간이 민폐로 느껴지고 과연 충분한 산후조리를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추수할 때쯤 몸을 풀겠다 싶으면 당장 씨앗 넣는 일을 멈추고 줄이는 등 농사 계획을 수정한다. 아마 대부분의
마당 한쪽에 심어놓았던 수선화가 싹을 내밀기 시작한 것으로 봐서 땅 속에서는 봄을 만드느라 분주한 모양이다. 나는 그들보다 먼저 서둘러서 대파 파종을 하고 밭에 퇴비를 뿌렸다. 밭 주변의 쓰레기들을 치우고 정리까지 했다. 밭에 뿌리던 퇴비를 남겨서 텃밭에 쓰려고 집으로 끌고 왔다. 퇴비를 뿌려서 손봐둘 자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봄에 심어야 할 푸성귀가 좀 많은가.집 뒤편의 20여 평쯤 되는 텃밭이 어느 순간부터 비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심어둔 도라지가 거슬렸다. 시어머니는 흡연을 하는 아들이 걱정되어 기관지
귀농 5년차, 나는 2022년 이번 해에 홍천군 영농 4-H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전에 다른 단체의 강원지부장을 맡기도 했었고, 워낙 이곳 저곳 단체 활동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마음가짐이 조금 다르다. 그건 내가 이 단체의 61대 첫 여성회장이기 때문이다.첫 여성회장이라는 타이틀은 나에게는 살짝 부담스럽지만 기분 좋게 설레는 책임감이기도 하다. 그동안 다른 단체에서 지부장 역할을 해야 해서 4-H 활동을 아주 열심히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회원들이 회장으로 지지해준 이유는 여성회원을 확대하겠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개
해는 부모와 같아서 맨날 봐도 좋고, 비는 형제와 같아 사흘만 봐도 지겹니라, 했던가요? 예전 옆집에 사시던 할머니께서 무심결에 던진 말씀입니다. 그 비유가 참 적절하게 느껴져서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 놓았다가 심심찮게 풀어 먹고는 합니다. 겨울가뭄이 하도 심해 지겨워도 좋으니 비가 흠뻑 내렸으면 하고 바람을 가져보는 요즘입니다. 또 있습니다. 아홉 번째 어머니라도 그 마음 씀이 형제보다 낫다고 어른들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언론에 드나드는 계부 계모들의 반인륜적 사례는 극히 일부이고, 실은 그 자리에 맞는 어른다움을 지키려고 노력하
긴 겨울방학에 이어 봄방학마저 끝나간다. 코로나로 아이들은 집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방학이 이렇게 지겨울 수가. 학부모로서 심신이 고갈되고 있다. “엄마, 저 좀 봐봐요”, “엄마, 이거 어떻게 해야 돼요?”, “엄마, 간식 뭐에요?”, “엄마, 엄마, 엄마!!” 내 눈·코·입은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나는 늘 집에서 아이들에 의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 스위치를 수시로 꺼야 한다.아이들 방학이 곧 엄마 개학이라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내 일을 기꺼이 미뤄두는 것이 엄마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오전 10시 넘도록 들에 나가지 않으면 영락없이 나미(2013년생 진돗개)가 나를 부른다. 콧바람을 쐬러 가자는 것이다. 낯선 사람이 왔다고 알리는 짖음과 나를 부르는 짖음이 다르다. 나미와 돌쇠(4살, 나미 아들)는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있는 현관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다니는 눈길이 심히 부담스럽다. 1시간의 짬을 내서 나미와 돌쇠를 트럭에 태우고 나가 들판에서 잠깐이나마 목줄 없이 뛰놀게 해줘야 비로소 맘이 편해진다.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개를 키우는 목적은 거의 영양보충을 위해서였다. 마당 한쪽에 돼지나
2017년 귀농을 결심하고 실천할 당시, 도시의 친구들은 내가 농촌에서 3개월 이상 버티면 성을 바꾸겠다고 장담하곤 했다. 도시는 물론, 해외까지 나가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내가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도 벅찰 것인데, 심지어 시골살이를 자처하는 것을 보고는 못 견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친구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어느덧 나의 귀농 생활은 5년이 넘어가고 있다.매년 여름 찰옥수수를 삶아서 팔기 위해 파라솔이나 천막을 치고 걷기를 반복하면서, 옥수수 장사 경쟁이 심한 동네에서 끊임없이 시비가 걸리는 탓에 작년 여름 정식으
일전에 지인들과 함께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인지라 굳이 소개를 안 해도 되었지만, 여럿이 모인 자리인 만큼 각자 가지고 있는 콩알만 한 직위라도 소개하며 공적인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KF94 비말 차단 마스크를 야무지게 쓰고서 말입니다. 하필 그날은 남편과 동행한 자리였는데, 진행자가 부부 중 한 명만 인사를 하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남편이 외부활동이 많은 내게 양보를 했기에, 마이크를 넘겨받고서는 분위기에 맞다 싶은 몇 마디로 인사를 채웠습니다. 짧은 인사 후 진행자에게
‘마스크!’ 아침마다 학교와 유치원으로 나서는 아이들에게 확인하는 말이다. 가방을 메고 가듯 마스크를 쓰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으며, 17개월 막내도 밖에 나갈 때면 마스크를 껴달라고 입과 귀 사이에 손을 댄다. 상상도 못했던 일상이다.셋째를 임신하고 나서 코로나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첫째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지만 입학식 없이 집에서 EBS 방송을 보며 1학기를 보낸 후, 2학기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교를 갔다. 하교 후에도 예전 같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어둑해질 때쯤 마지못해 집으로 왔을 텐데 지금은 거리두기가
얼마 전에,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여성농민들을 인터뷰하고 싶다며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농민의 ‘농’자 마저 거론하지 않는 매체들이 대부분인데 흙 속에 묻혀서 보이지도 않는 여성농민을 굳이 들춰보겠다는 의지가 실로 가상하기까지 했다.신문사 기자가 이쪽의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내가 통역사 노릇을 하느라 인터뷰 자리에 같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76세이고 논 500평, 밭 1,500평이 남편 명의로 되어 있다고.결혼 전, 그러니까 어렸을 때의 꿈이 무엇이었냐고 기자가 물었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라 눈 뜨면 끼니 해결이
농촌살이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농촌 창업은 도전해볼 만한 일, 혹은 생계를 위해서 한 번쯤은 고려해보는 일인 듯하다. 도시에서 알고 지내던 동생은 애견힐링센터를 하고 싶다고 문의를 하고, 친한 언니는 명상치유센터를 운영하면서 원예치유체험장과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고 한다. 또래 친구는 커피체험농장을 하며 비누 등을 만드는 공방 카페를 하고 싶단다.이들은 먼저 농촌에 정착한 내게 청년창업농 지원사업에 대해 묻고, 대출 금액과 방법 등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이들에게 왜 농업·농촌이냐고 되물었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앞으로 먹고살려면 지원사업
어느덧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절이 돌아왔습니다. 동지팥죽도 해 먹었고, 빈독에 넣어둔 홍시도 물러진 채 다 떨어져 가고, 동치미는 한창 맛이 들었습니다. 이제 통장에 공공비축미 정산대금만 들어오면 진짜 한 해가 마무리되는 셈입니다. 돈이 들어오면 이자를 해결하는 농가도 있을 테고, 아니면 농약방에 밀린 외상값을 갚아야 할까요? 농가 살림 규모가 클수록 세밑이 무섭겠지요. 암요, 올 한 해도 다들 고생하셨습니다.처음 결혼하고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 선배 언니들이 여성농민을 무급 종사자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말뜻을 몰랐습니다.
귀농 초기 동네에 있는 허름한 빈 집을 구해 살던 시기에 한지 바른 나무틀에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촌집에서 여러 달 산 적이 있었다. 고요하고 깊은 어두움이 존재하는 농촌의 밤은 보통 고단함에 쓰러져 자기 바쁘지만, 동거인이 없는 밤에는 나를 지키기 위해 꼭 칼을 가까이 두고도 뒤척이다 잠이 들곤 했다.‘사람이 제일 무서워’, 딱히 연고 없이 타지에 뿌리를 내린 씩씩한 언니들도, 동네 터줏대감 같던 할매들도 난데없이 마주치는 뱀보다 혼자 김매고 있을 때 등장하는 남자 사람에 더 겁난다고들 했다. 이 말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주변
끝이 보인다. 나락타작을 마치자마자 보리갈이를 해서 싹이 나온 후부터는 일감이 느슨해졌다. 언제까지고 나를 쫓아다니며 닦달할 것만 같았는데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메주를 쑬 시기이고 그럴 짬이 생겼다.장날 메주콩을 사러 갔다. 소매상 앞에 펼쳐 놓은 콩을 보니 세상에! 깨끗하게도 손질했네 싶었다. 소매상한테 콩을 판 사람이라면 분명 나와 처지가 비슷한 농사꾼이리라. 세수시켜 놓은 아이의 얼굴같이 해맑은 콩을 팔려고 몇 날 밤을 TV 앞에 엎드려서 콩을 골랐을까?베어 놓은 콩이 많을 경우 콩 타작 기계를 기술센터에서 빌려서 활용할
부모님의 농장으로 귀농한 승계농 후배의 이야기다.부모님 농장에서 한 달 품값이라기엔 턱없이 부족한 용돈을 받으며 일을 배우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나는 독립을 권했고 본인도 부모님과의 지속적인 갈등과 자기 미래를 고려해 독립을 선언했다.하지만 독립의 꿈은 너무도 빨리 좌절됐다. 당장 자신이 원하던 기회가 마련됐음에도 후배는 당분간은 어렵겠다며 속상함을 토로했다. 독립 자금을 주시겠다고 했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부모님의 말씀에 알아서 해야겠다 싶어 대출을 알아봤는데 농업경영체등록증도 없고, 농수축협 조합원도 아닌 자신의 신용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혼자 사는 남성 노인들의 집에 더부살이하려는 여성 노인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온갖 집안일에 농사일까지 하며 살림을 꾸려가거나, 마을주민들과 낯이 익을 때까지 두문불출하고서 살림만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노인 돌봄 노동을 위한 재혼, 혹은 동거를 하게 된 것이고, 이는 마땅한 생활 수단이 없는 여성 노인들의 최후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자녀들이 사회성이 좋은 경우는 어머님 소리도 듣고 존중받으며 살았지만, 간혹 아버지의 재산을 어떻게 할까봐 잔뜩 경계하며 무시당하기도 했습니다.잘 살면 다행
콩·팥과 같은 열매에서부터 지상부가 시든 약용작물의 뿌리까지 갈무리로 손 가는 일이 지천에 널린 수확의 계절을 보내고 있지만, 내 통장은 여전히 조용하다. 씨앗 한 알이 거두어들인 것을 보면 늘 경이롭고 고마운 마음이지만, 올해는 유독 8월 늦장마가 길었고 난데없이 10월 중순에 영하로 뚝 떨어지는 통에 예상보다 상품으로 낼 만한 것들이 적은 편이었고, 그중에 좋은 씨앗을 선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음속으로 참을 인(忍)자를 새기지만, 생계를 생각하면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농사의 효율에 차라리 놉을 나가야 하나 싶을 때도
벼 타작을 할 때마다 논 모서리 벼를 베지 말라고 남편은 내게 당부한다. 그깟 것 몇 푼이나 되냐고.벼 타작할 때는 새벽 5시쯤 집을 나서서 일을 시작해도 밤 10시가 넘도록 시간이 빠듯하다. 전날 건조기에 말려 놓은 나락을 꺼내면서 콤바인 청소를 한다. 콤바인 청소는 남편의 영역이지만 같이 거들어야 빨리 끝낼 수 있다. 이슬이 내리지 않았으면 콤바인 기름칠을 하자마자 나락 꺼내는 일은 중단하고 곧바로 논으로 달린다. 9시 전에 남편이 콤바인을 끌고 논으로 들어간다. 타작을 일찍 시작했으니 밤 10시 전에는 집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언니, 바빠요?’ 친한 동생이 연락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이렇게 인사를 꺼내는 통화는 대부분 집안일이다. ‘또 부모님이랑 한바탕 했구나.’나에게 전화를 한 동생은 몇 년 전 귀농해서 부모님과 축산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여성농민이다. 농대에서 축산을 전공하고 해외에서 유학을 하다가 집안 사정으로 귀국해서 부모님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농장을 꾸려가고 있다. 많이 배웠고, 능력도 있고, 가축들을 너무 좋아해서 농장 일에 매우 열정적인 친구다.그런데 이 친구는 가끔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서 연락을 하곤 한다. 그 원인은 대부분 부모님
10월에 30도를 넘고 며칠 사이에 남도까지 첫서리가 내리는 등의 널뛰는 날씨 때문에 농사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지만, 그래도 얼추 수확이 마무리되는 즈음입니다. 수확 시기에 농민의 시간은 분 단위로 나눠 써도 모자라고 또 모자랍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던 전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 생각 저 생각 상념에 빠집니다.일전에 세계 여성농업인의 날 행사가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었고, 여러 행사 가운데 눈여겨 볼만한 내용이 있었으니, 오전에 있었던 국제 청년여성농업 정책토론회였습니다. 마늘 심을 준비를 하려고 창고에서 마늘쪽 분리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