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식 연필은 18세기에 프랑스의 ‘콩테’라는 사람이, 흑연과 진흙을 짓이겨서 만든 연필심을 고온에서 굽는 방식으로, 처음 실용화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연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후반이며, 국산 연필공장들이 문을 열었던 때는 1940년대 중후반이었다.연필 제조업체들의 연혁을 살펴보니, 해방직후인 1946년 10월에 ‘동아연필(주)’이 설립되었고, 1949년 5월에는 ‘문화연필(주)’이 창립된 것으로 나온다.2002년 8월에 내가 찾아간 곳은 전주시 팔복동에 위치한 문화연필 공장이었다,공장에 들어서자 저만치에서, 완
1960년대의 어느 월요일, 시골 국민학교 교실.담임선생은 교단 옆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대신에 반장이 앞으로 나가 교탁에 섰다. 반장아이는 칠판에다 서툰 분필 글씨로 ‘검소한 생활을 하자’라고 크게 써놓고는 돌아선다.-지금부터 학급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학교에서 정해준 금주의 주훈은 ‘검소한 생활을 하자’입니다. 그러면 이에 따른 실천사항을 정하겠습니다. 좋은 의견 있으면 발표해 주십시오.시키니까 하는 것이지, 그런 겉치레 회의를 재미있어할 아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교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얼굴엔 영양실조로 군데군데 버짐
목포항에서 여객을 태운 가야호가 뱃고동 소리를 두어 번 길게 울리고는 드디어 부두와 멀어진다. 하지만 조타실 지붕에 설치된 확성기로 ‘사아공의 배엣노래…’를 가물거리며 출항한 가야호가 제주도를 향해 직항한 것은 아니었다. 가야호의 항로는 먼저 진도의 ‘벽파’라는 곳에 한 번 접안을 하고, 다시 추자도에 기항을 한 뒤에 뱃머리를 제주항으로 향하도록 돼 있었다.그런데 1960년대에 목포에서 추자도까지 다니던 단골손님 중에는 유명인사가 있었다. 박치기 왕으로 이름난 프로레슬러 김일이었다. 박준영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김일 선수가 낚시를
1970년대 초의 어느 여름 저녁, 목포항 부둣가 골목은 제주행 여객선을 놓친 피서객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낙담과 불평들이 쏟아졌지만, 멀리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여행객들 중 제주행을 포기하고 되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그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호객꾼들이 있었다.-자, 식사들 하세요! 숙박도 됩니다아! 우리 식당에 딸린 방에서 주무시고 내일 출발하세요!-이봐요, 아니 순서가 끝도 없이 밀렸는데 내일이라고 배를 탈 수 있겠어요?-앗다, 돈만 낫이 주면 내가 책임지고 가야호 태워줄 것잉께, 걱정 말고
피서 철에 사람들이 몰려서 제때 배를 못 타거나 혹은 태풍주의보가 빨리 해제되지 않아서 목포에 발인 묶인 경우 가장 곤란을 겪은 사람은, 모처럼 육지에 볼 일이 있어서 나온 제주도 사람들이었다.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려던 사람들이야 여의치 않으면 집으로 되돌아가면 그만이겠으나, 제주도 사람의 경우에는 기약 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배 뜰 날 만 기다리는 수밖에.잠깐 일보고 돌아가려고 왔다가 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아 꼼짝 못 하게 된 제주 사람들에게, 우선 급한 것은 체재경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전화가 됩니까, 송금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1970년대 들어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겠다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불어났지만 여객선의 수송능력은 한계가 있었던지라, 부두에 몰려나왔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표를 구하지 못한 채,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숙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제주행 여객의 적체를 부채질했던 이유가 또 있었다. 걸핏하면 발령되는 태풍주의보였다.-아, 아, 승객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태풍주의보가 내려서 오늘 제주행 여객선 못 뜹니다!출항 시각이 임박해서 갑자기 이런 방송이 흘러나오면, 대기하고 있던 승객들은 애꿎은 여객운송회사의 영업부 직원에게 매우 거칠게
1965년 8월 12일, 목포 앞바다에 진귀한 구경거리 하나가 등장했다. 사람들이 다투어 항구로 몰려나왔다. 상당수 시민들은 보다 좋은 자리에서 구경하려고 유달산 중턱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열흘 남짓 뒤에 제작된 (제431호)는 그 장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지난 8월 12일 목포와 제주도 사이를 하루에 왕복하는 여객선 가야호의 취항식이 전라남도 목포항에서 있었습니다. 교통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 가야호는 총 톤수 500톤으로 승객 442명과 200톤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연안 도서 간을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관광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귀에 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민들 대부분의 당면과제가 굶주림과 헐벗음을 벗어나는 것이었으니, 누군가에게 구경삼아 어딜 간다고 얘기하면 단박에 “팔자 늘어졌네”라는 비아냥 섞인 대꾸가 건너오기 일쑤였다.오늘날 국내 관광여행지를 순위로 매길 때 부동의 윗자리를 차지하는 제주도 역시, 당시엔 관광지로의 개발이 거의 안 돼 있었다. 개발이 안 돼 있기로는, 제주로 향하는 해상교통의 관문이라 할 목포항 역시 마찬가지였다.“여기가 수심의 높낮이가 좀 커요. 6미터 가까이나 되거
토요일 오후, 서울 방화동의 한 가정집이 시끌벅적하다. 고희를 넘긴 그 집 가장의 생일 축하모임 때문이다.-아니, 박 서방 아직 도착 안 했어? 출발했다고 연락 온지가 한 시간 반이 넘었는데?-오늘 주말이라 길이 좀 많이 막히는 모양입니다.-아무리 길이 막혀도 그렇지 거기도 서울인데 이렇게 오래 걸린단 말이야?-형님도 참, 말이 같은 서울이지 거기는 북쪽 끝에 있는 노원구 상계동이고, 여기는 서쪽 끝에 있는 강서구 방화동 아닙니까.그때 마침 대문이 열린다. 그런데 현관을 들어선 사람은 상계동의 그 박 서방이 아니다.-어어? 제주도
“철부지 시절의 일이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여러모로 미안하고 죄스럽지요. 내가 그 어른들 나이가 되고 보니까, 그때 위아래도 몰라보고 천방지축 날뛰면서 부잡스럽게 굴었던 행동거지가 막 후회가 돼요.”소싯적에 닭서리를 워낙 심하게 했던 탓으로 그 시절에 닭을 도둑맞았던 여러 고향 어른들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강원도 화천 출신의 전만제 씨가 뒤늦게 쓰는 반성문이다. 그의 반성문에는 단지 남의 닭을 훔친 데 대한 죄송함만 담긴 것이 아니다. 무뢰배처럼(그의 표현) 마을 어른들에게 안하무인격으로 굴었던 패행(悖
남의 닭을 몰래 잡아다 먹는 닭 서리야말로 ‘서리의 하이라이트’라 할만 했다. 그러나 농작물 보다는 훨씬 더 귀하게 여기던 ‘가축’을 훔친다는 점에서, 농촌사회의 관행이나 풍습으로 가벼이 보아 넘기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있었다.참외 서리나 수박 서리는 들키더라도 그냥저냥 넘어갈 수가 있지만, 닭을 훔치다 발각되는 날엔 최소한 주인에게 시가(時價) 배상은 해 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돼지 서리’ ‘염소 서리’ ‘소 서리’라는 말은 없어도 ‘닭 서리’라는 말만은 매우 친근하게 들리는 걸 보면, 닭 한두 마리를 몰래 잡아먹는 정도는 심
이쯤 되면 ‘서리’를 경험하지 못 한 젊은 독자들의 경우, 부모나 조부모 세대가 들려주는 그 궁핍하던 시절의 치기어린 장난을, 아련한 옛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담 정도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그렇게만 받아들이기엔 조금쯤 멈칫거려지는…‘선을 넘는 녀석들’이 있었다.가을 밤, 제법 머리가 큰 여드름투성이의 사내 녀석들이 울타리를 타넘고 들어가서 참외서리를 시작한다. 그 때 원두막에 등불이 켜지고, 참외밭 주인이 손전등을 비추며 소리친다.-이놈들, 게 섰거라!이런 경우 서리를 하던 녀석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느라 여념이 없어야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소싯적의 서리에 얽힌 얘기를 할 때면, 가장 흔하게 들먹이는 것이 바로 참외 서리다. 그런데 밀 서리나 콩 서리 따위야 초등학생 나이의 어린 아이들도 즐겨하곤 했지만 한밤중에 작심하고 참외밭으로 서리 행차를 나가는 축은, 아무래도 제법 덩치가 굵은 청소년들이었다. 물론 그보다 어린 아이들이 형뻘 되는 사람들을 따라 나서기도 했지만.여름 달밤, 동네 고샅을 지나 풀벌레 우는 들길로 세 명의 청소년들이 나섰다. 네 명은 다소 번잡하고, 두 명은 좀 불안하다. 그래서 참외든 뭣이든 과일 서리 행차에는 세 명이 맞춤하다.
‘서리’는 행위 주체가 우선은 아이들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장난이 관용으로 용인될 수 있다. 또한 콩이나 밀이나 수숫대나 고구마 등의 밭작물인 경우 ‘설익은 풋것’을 먹을거리로 취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리라 부를 수 있다. 만일 가을철 추수기에 남의 밭에 들어가서 다 익은 옥수수나 밀이나 콩 등을 마구 채취해 온다면, 아무리 적은 양일지라도 그것은 남의 수확을 가로챈 셈이 되므로 ‘장난’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끄슬려 먹고 벗겨 먹고 하려면 역시 풋것이라야 부드럽고 맛나다.그렇다면 들판이 휑하니 비어버린 한
일반적으로 ‘서리’는 사내아이들이 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참외든 복숭아든 남의 것을 훔쳐 먹으려면 밤 시간에 끼리끼리 모여서 작당을 해야 하는데, 당시만 해도 부모들은 딸이 밤 마실 가는 것을 여간해서는 허락하지 않았다.하지만 경로당에 모인 농촌 출신의 할머니들이 소싯적을 회상할 때면, 어김없이 서리에 관한 추억을 빼놓지 않는다. 그들도 서리를 했다. 대신에 소녀들의 서리는 매우 소박했다.초여름 어느 날 빨래터에서 돌아오던 너덧 명의 소녀들이 뉘 집 밭 들머리의 풀밭에 앉았다.-뻐꾸기도 배고프다고 울어쌓고…우리 저 아래 춘식이네
장면 #1. 국민학교 하굣길.-아이고, 배고파 죽겠다. 요즘은 학교에서 왜 우유가루 배급도 안 주지?-우리 저 쪽 산길로 해서 집에 갈까? 산딸기 익었을지 모르는데.-딸기 그거 몇 개 따먹는다고 배가 부르냐. 얼른 집에 가서 삶은 고구마나 먹는 게 낫지.-얘들아, 저 쪽 영길이네 밭에서 밀 서리 해다가 구워 먹을까?-밀? 아직 다 안 익었을 텐데….-바보야, 지금이 딱 좋아. 너무 익어버리면 맛이 없잖아.-좋아! 난 불 피울 테니까, 너희 둘이 밀밭에 들어가서 이삭 모가지 잘라가지고 와.-알았어. 누구 오나 망 잘 봐야 돼. 영길이
1970년대에 접어들자 소금가마를 짊어지고 행상을 하던 고전적인 소금장수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에 소금의 수급이 수협이나 농협의 유통망을 통해 이루어졌다.-아, 아, 주민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각 호별로 소금 신청을 받았는데, 그 때 주문한 소금을 농협에서 받아왔으니, 마을회관으로 나와서 소금들 타가세요.“동네 스피커에서 그런 방송이 나오면 집집마다 양푼이나 포대를 가지고 나가서 소금을 배급받았지요. 1961년 이전까지는 소금이 전매품이었거든요. 웬만한 집은 두 말, 부잣집이라야 서 말 정도 신청을 했어요. 한
소금장수가, 묵고 있던 주막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주모, 그 동안 잘 지냈습니다.-소금 다 팔았능교? 아이고, 그 곡식 자루들을 우에 가져 갈 낍니꺼?-허허허, 지게 목발이 부러지도록 곡식이 더 많았으면 좋겠소이다.그 때 동네 아낙이 급히 주막으로 들어선다.-소금 사러 온 기 아이고예, 혹시 녹두 받은 거 있으면 좀 사러 왔는데….-아, 마침 녹두 한 됫박 받아 놓은 거 있어요. 팥도 두어 되 되는데 필요하면 사가시지요.이렇듯 소금장수는 소금과 바꾼 곡식들을 묵고 있던 주막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곧바로 팔기도 했으나, 대체로는 인근
우리나라의 염전은 대부분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이나 남해안에 분포한다. 그렇다면 염전이 없는 경상도 북부 내륙이나 강원도 사람들은 소금을 어떻게 공급받았을까?“지역마다 소금이 운반되던 ‘소금길’이 있었어요. 특히 경상도나 강원도엔 염전이 없잖아요. 그러니 서해의 염전에서 나는 소금을 운반해 와야 하지요. 옛날엔 금강 하구를 출발한 소금배가 강을 따라 100킬로미터 이상 죽 올라가서 부강(芙江) 나루까지 들어왔어요. 그 포구에서 하역된 소금이 이제 충청북도, 경상북도, 멀리 강원도까지 육로로 운송이 됐지요. 하지만 소금 가마니를
강화도 석모도에서 배를 띄워 황해도 연백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모두 소금을 ‘팔러’ 갔던 것만은 아니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석모도로 피란 내려온 연백 사람들은, 며칠 동안 난리를 피했다 돌아갈 양으로 별 준비 없이 단출하게 내려왔던 것인데, 예상과 달리 전황은 점점 더 격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자 호구지책이 막막했다.-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혀버렸고…그렇다고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이남에서 굶어 죽으나 이북에 올라갔다가 잡혀 죽으나 매일반 아니갔어. 고향 마을에 숨어 들어가서 뭣이든 가지고 나옵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