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만 더" 영화보다 더 비극적인 현실을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무서운 시상을 살았노라”고, 내겐 고모부 되시는 분이 세칭 부역자였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부역자가족을 즉결처분하는데 그 어머니가 설맞아 죽지 않고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함께 내뱉은 단말마.제주는 지금쯤 감자를 다 캐내고 다른 작물을 심느라 손이 분주할 것이다. '지슬' -땅의 열매, 제주도민의 삶과 한이 서린 감자는 오늘도 그들의 삶의 중요지점이다. 한해농사는 전쟁이 나도, 아비가 죽어도, 태풍우가 쳐도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 그 땅에서 은밀하게 속삭이며 싹을 틔우던 지슬은 오늘도 그 기억의 꼭지마다 싹을 틔운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부러지고
성황당은 윗말과 아랫말을 나누는 산굽이를 돌아 서 있었는데, 그 옆으로 약수터가 하나 있었다. 지금도 바위틈을 뚫고 나와 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 맛은 잡내 없이 시원하여 여전히 놓여있는 표주박으로 목을 축이곤 한다. 그 전에는 약수라는 소문이 있어 먼 데서도 물을 뜨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몇 년 전에 시에서 약수터 수질검사라는 것을 한 다음에 음용 부적합수 판정을 내린 다음부터는 그만 졸지에 약수터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옹달샘 정도로 전락한 곳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약수터가, 그러니까 어찌된 연유인지 몰라도 오염되어 부적합수가 되기 한참 전인, 19세기 말엽에 영험한 약효를 발휘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때는 역사에서 임오군란이라고 이름 붙인 난이 일어난 1882년이었다. 군란을 당한 민비가
몇 년 전 이맘 때 한 후배로부터 택배 상자 하나를 받은 적이 있다. 마흔이 넘어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만난 후배로 어릴 때처럼 짧은 시간에 친해지기 쉽지 않아 아직은 서먹한 때였다. 그날은 마침 동기들과 우리 집에서 한약재를 이용해 머리를 맑게 해주거나 소화를 돕는 향기주머니를 만들어보고 있던 차라 여럿이 같이 궁금해 하면서 상자를 열었는데 라면이나 담겼음직한 그 큰 상자에는 처음 본 나물이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선배님, 이 전호나물은 제 시댁인 울릉도에서만 나는 귀한 것이니 맛있게 요리해 드세요.’라고 적힌 쪽지 하나도 같이. 한꺼번에 생나물이 너무 많이 왔기에 그날 같이 일 하던 동기들과 나누고 헤어진 후 그 나물 맛이 궁금해진 나는 참지 못하고 바로 조리해 저녁상에 올렸다. 그리
과수원 뒤로 언덕 같은 산이 있어 심심찮게 장서방댁네가 아침부터 골을 울리는 소리를 내지른다. “꿩꿩 장서방./ 자네 집이 어덴가?/이 등 저 등 넘어서/ 솔배닥 밑이 우리 집일세/ 무얼 먹고 사는고 /꼬진다리 이밥에 눈꼽재기 조밥에 /그럭 저럭 사네.” 장서방은 장끼를 의인화해서 부르는 말이다. 꼬진다리 이밥이나 눈꼽재기 조밥 같은 말은 지금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런 모양새나 느낌을 가진 특정한 품종을 그리 표현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부르는 구전동요로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심심풀이로 부른다. 모 방송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에 자주등장하기도 했다. 이제는 나이 들어 모두 돌아가시니 제소리로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일부유치원에서 전래동요
헛기침 몇 번에도 좀처럼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정선택이 양만득을 향해 부르는 듯한 손짓을 했다. 알아차린 양만득이 마치 하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들었던 술잔을 얼른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가 정선택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자, 정선택이 다시 손사래를 치며 말리는 시늉을 했다. “아니, 오라는 게 아니고, 자네가 동계장이니께 말머리를 잡아서 회를 이끌라는 거시여. 이리 중구난방으로 떠들기만 할 게 아니고.” 그제야 아래 위 상에서 티끌처럼 일던 발부리들이 시나브로 잠잠해졌다. 갑자기 일어선 양만득이 무슨 말을 꺼내야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정선택을 바라보았다. 겨우 입을 떼어서는, “아, 예. 지가 생각은 허고 있었는디유, 상이나 줌 물리구 헐까, 그랬쥬.” 했는데, 말이 떨어져 고물도 묻기
시골에 살면서 느끼는 재미중의 하나는 품앗이나 물물교환 비슷한 경제활동에 있는 것 같다. 하동에서 양조장을 하시는 분께서 장 담글 메주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기에 작년 늦가을에 만들어둔 메주를 조금 나눠드렸더니 빚이라 생각하여 벼르고 계셨는지 어제는 섬진강 하구로 벚굴을 먹으러 오라는 특별한 초대를 해주셨다. 초대를 받고 가는 길에 만난 섬진강은 봄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했는데 성삼재를 넘어가기 전 까지는 볼 수 없었던 봄기운이 구례를 지나면서는 노란 산수유꽃으로 왔고, 하동이 가까워지자 막 터지기 시작하는 매화꽃망울들이 곧 먹게 될 벚굴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다. 섬진강에서 벚굴은 설을 전후해서 채취하기 시작하지만 벚꽃이 한창인 3~4월이 가장 맛있는 때라고 한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힘들 때 스스로를 달래거나 포기하는 심정을 나타내는 말 중에 ‘시골 가서 농사나 짓지’라는 말을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농사도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아서인지 그런 말을 듣지 못한다. 아마 그런 식의 말들은 세상을 경영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아 낙향하는 관리들이 ‘귀거래사’를 쓰면서 농사짓기를 남은 생의 일로 받아들인 것으로 비롯하지 않았을까 싶다. 청구영언에 이런 시조가 있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 도곤 어려 왜라 / 이후엔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 이괄의 난을 평정한 장만이라는 사람이 쓴 시조다. 풍파나 구절양장이나 당쟁의 어지러움을 나타낸 것이고 그 속에서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고 있다.
아내는 음식 준비를 거들기 위해 먼저 내려갔고 서준석은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다시 잠이 든 영주를 흔들어 깨웠다. 농협에서도 오고 면 직원도 오는 오늘 같은 날에는 그냥 집에 두고 가고 싶지만 어차피 잠이 깨면 득달같이 달려올 게 뻔한 일이었다. “아부부부, 엄마, 엄마.” 설 쇠면 스물일곱 살이 되는 영주가 정확하게 발음하는 단 하나의 단어는 엄마, 였다. 무슨 영문인지 세 살짜리 정도의 지능에서 멈추어버리고 몸만 자란 영주는 평생의 업으로 남은 딸이었다. 서준석은 열 시가 조금 넘어 트럭 옆자리에 영주를 태우고 회관으로 나갔다. 걸어가도 금방이지만 오후에 농협에 나가볼 일이 있을 것 같아 차를 끌고 간 것이었다. “어서 오씨요, 형님. 요즘은 통 커피도 마시러 안 나오시고, 뭐 삐
세대에 따라 미팅의 풍속도도 달라진다. 내가 미팅을 하고 다니던 시절에는 창경원에 벚꽃이 피면 그곳에 가서 ‘밤 벚꽃맞이 미팅’을 하고, 가을에 배가 익으면 태릉의 과수원에서 ‘배밭미팅’을 했다. 그리고 딸기가 익기 시작하는 늦은 봄과 초여름에는 수원까지 가서 하던 ‘딸기밭미팅’도 있었다. 요즘의 젊은 친구들이 들으면 구태의연하다면서 그런 미팅을 재미있어 할 리도 없지만 계절을 모르고 나오는 과일과 채소들로 인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늦은 봄 미팅에서 만난 풋풋한 젊은 남녀가 노지에 엎드려 따먹던 딸기, 그 딸기가 요즘은 한겨울부터 비닐하우스에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리산으로 이사를 오던 해 봄에 알고 지내던 한 농부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딸기가 더 이상 상품가치가
디오게네스하면 통속의 철학자라고 기억한다. 집도절도 없이 오로지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죽을 때까지 생각하며 살았던 괴이한 철학자라고 한다. 동방을 정복한 알렉산더도 그의 이름을 들었는지 그를 찻아 거리로 나섰다. 그는 여전히 통속에 몸을 의지 한 채 이를 잡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 줄 테니 말해보라”.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왕이시여 조금만 물러나 나에게 햇살한줌이 돌아오게 하소서”디오게네스처럼 소유를 부정하고 권력을 조롱하며 철학한 사람들을 견유학파라고 한다. 이는 개처럼 떠돌며 산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학파의 극기적인 생활철학은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주었으며 로마제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할 때에 빛을 보기도 했단다. 오로지 자신을 완벽하게 버림으로서
3월 5일은 동면을 하던 동물들이 개어나서 꿈틀거리며 활동을 시작하는 절기인 경칩이다. 이 무렵부터는 동물 뿐 아니라 식물들은 새싹을 틔우고 온 세상의 생명체들이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인체도 자연의 일부이니 겨울동안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힘차게 일어나야 하지만 봄이 되면 이상하게 몸이 더 나른해지고 자꾸 아래로 처지게 되어 피곤함을 느끼게 되므로 봄에만 오는 그런 인체의 현상을 우리는 특별히 춘곤증(春困症)이라 부른다. 이른 봄에 인체가 느끼는 피곤함을 이겨내는 음식들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긴긴 겨울동안 몸 안에 쌓여 있던 노폐물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고 기지개를 켜게 하는 것으로 고로쇠 수액만한 것이 없다. 수많은 봄나물들이 있지만 하우스 재배가 아니고서야 경칩 무렵에 구경하기 어려우
“뭔 놈의 눈이 사흘거리로 이렇게 쏟아지나 몰라. 눈 치다가 사람 잡겄네.” 들어줄 사람이라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마누라밖에 없는데 귀가 막혔는지 그릇만 달그락거릴 뿐 대거리조차 없다. 아마 그저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아침 드라마에 귀를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서준석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담배를 눌러 끄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간밤에 또 반 뼘 턱은 되게 눈이 내렸다. 눈이 얼어붙기 전에 길을 치지 않으면 차가 미끄러져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집 앞길에서 마을의 큰 길로 나가는 데까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경사가 만만치 않아서 내려갔다가 올라오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야 회관 앞에 차를 세워두고 오가며 볼일
“안 보는 데선 나라님도 욕한다”는 속담이 있다. 억눌리고 밀려난 자들이 내뱉는 욕은 결국 자신을 향한 배설일 뿐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 것 조차도 못하게 하는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 그 예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다. 두 정권의 종말은 국민들의 열망을 무시하고 분출하는 욕을 통제하면서 비롯된다. 우리 사회는 이중성의 사회이다. 분명 욕하지 말라고 어린 아이때부터 배운다. 그러나 현실에선 입만 열면 욕이 튀어 나온다. 초등학생, 중학생은 욕이 빠지면 말이 되질 않아 대화가 어렵다고 할 정도다. 하지 말라고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풍선을 누른 것처럼 어느 순간 뻥 터지고 만다. MB정권은 욕먹을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사회, 정치적 욕의 영역에 철조망을 쳐댔다. 문화
“내게 토종종자는 떼어놓을 수 없는, 그런 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 생각만 할 것 같거든요. 제일 좋고, 궁금하니까.” 1969년 입사한 농촌진흥청에서 정년퇴임하는 그 순간까지 안완식 박사는 유전자원, 토종종자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퇴임 후부터 토종종자와 함께 더욱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매년 군 단위로 토종종자를 수집하고, 지금은 이를 바탕으로 도감을 만들고 있다. 귀농·귀촌 또는 도시농업하는 사람들을 위해 강의도 하고, 2008년 개설한 인터넷 카페 ‘씨드림’ 활동도 활발히 하며 쉴 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안 박사. 그에게 토종종자란 무엇일까. 끝없는 그의 열정은 오직 토종종자만을 향해 있었다.
때는 2011년 10월 28일. 한미자유무역협정 날치기 통과를 막기 위해 여의도에서 집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국회 북문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경찰들이 국회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아서서 버티고 있고 여기저기서 고함소리, 구호외치는 소리,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 와중에 국회 북문은 경찰 저지선이 뚫려 몇몇 사람들이 국회로 들어갔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국회 밖에 있던 사람들은 경찰이 쏘는 물대포에 밀려나야했다. 그때 북문 앞에서 같이 있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언니님들 중에 몇 분도 국회에 들어가셨고 심지어 연행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중에는 내가 ‘언니네 텃밭’꾸러미를 받고 있는 김제 공동체의 강다복 회장님도 있었다. 소식을 들은 나는 ‘아이고 이런!
“간, 쓸개 다 빼줄 듯 한다” 는 말이 있다. 간이나 쓸개는 오장육부 중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장기이다. 간을 빼서 바위에 널어 말린다는 토끼를 제외하곤 간, 쓸개를 빼고 살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런데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조선시대 선비들은 우심적이란 소의 심장구이를 즐겼다 한다. 존경하는 사람이나 극진한 친구에겐 반드시 대접할 정도로 인기 있는 식재료로 소의 심장과 간을 구웠던 것이다. 이는 진나라 주의가 소의 염통을 구워 왕희지에게 건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이후로 소의 염통은 사대부의 최고 음식이며 자신의 마음을 담은 음식으로 보았던 것이다. 서거정의 문집이나 정약용의 시문에도 우심적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사대부들에게 일반화된 간, 쓸개 빼주기의 전화된 모습인 것 같다. 이는 조
오늘로 ‘봄여름가을겨울’ 연재를 마감합니다. 이년 하고도 여덟 달 동안 130 편의 산문을 실었고 이제 귀한 지면에서 물러나게 되어 한 가닥 소회가 솟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돌아보면, 우연한 인연이 되어 농정신문에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돌아봄이 있었습니다. 우선 연재라는 강제(?)가 없었더라면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글들이었고, 일주일에 한번 쓰는 연재를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울 수 있었습니다. 한없이 게으른 제가 글감을 얻기 위해서라도 제 주변과 스스로를 항상 주시해야 했지요. 마치 일주일 내내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쓸만 한 이야기가 덥석 물지 모르니까요. 때로는 마감 전날까지 입질이 없어 초조한 적도 있지요. 그래도 즐거운 초조함이었습니다. 저
선생을 만나기로 한 곳은 임실읍사무소 2층이었다. 읍민들을 위한 문화센터에서 선생은 한창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여러 서예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출중한 글씨 실력을 가진 선생은 서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했다. 정신집중과 건강에 좋은 취미이며 과거에 함께 농민운동을 했던 여러 어른들도 서예를 한다고 했다.다정다감한 어조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선생의 표정은 담담했다. 일 년 넘게 뇌졸중으로 투병하고 있는 아내를 돌보는 중이라고 했다. 작년에 돌아가신 노금노 선생이나 역시 투병중인 이수금 선생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짙은 외로움이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선생은 오랜 세월 농민운동을 한 분답게 연로한 나이임에도 기억력이 또렷했고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사는 마을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기어이 뒷산이 알몸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난 초겨울, 몇 대의 트럭과 전기톱을 든 사내들이 들이닥쳐 산에 살던 나무들을 남김없이 베어버렸다. 베어진 나무들은 트럭에 실려 사라졌고 이 겨울, 나무들이 서 있던 자리는 앙상하게 눈에 덮여있다. 일 년쯤 전에 쓴 글과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우리 마을이 뒤란삼아 쓰던 야트막한 산이 건축업자에게 팔렸다. 매입한 사람은 산을 밀고 전원주택 수십 채를 짓겠다고 했다. 마을 주민 모두가 경악했고 당연히 반대했다.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었다. 여러 차례 마을회의를 하고 모두가 반대한다는 결의를 했다. 그리고 주민 전체 이름으로 시(市)에 탄원서도 제출했다. 탄원서 문안은 당연히 내가 작성했고 주민을 대표하여 이장이
올겨울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린다. 그러다 보니 농촌들녘은 해가 나도 눈이 쉬 녹지 않는다. 3월까지 하얀 눈밭일 것 같다. 11월 농사가 끝나고 나면, 12월부터 2월까지는 하우스 시공에다 보수작업, 비닐갈기 등등 다음 농사준비로 꽤나 바빠야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씩 내리는 눈에다 한파에다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 오래간만에 푹 쉬는 주변 농민들이 눈에 들어온다. 농민회 교육이라도 잡으려고 하면 하우스 일하러 간다는 소리에 힘이 빠지곤 했는데, 올해는 농민회 교육이 있다고 하니깐, 군말 없이 나온다. 역시 겨울엔 농사꾼은 쉬면서 교육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바쁜 농사꾼들이 있다. 바로 토마토 농사꾼이다. 춘천은 토마토 주 생산단지이다. 2월 말에 정식을 한다고 이 추운 겨울에 한파를